피플 > 환자 이야기 일어나, 현수야 2022.04.01

 

1분 1초가 지날 때마다 응급차 안의 공기가 희박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숨이 멎기라도 하면 서울까지 갈 생각 말고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가야 합니다”라는 의사의 당부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현수(남, 16세)는 조혈모세포 이식이 실패한 뒤 자가 호흡이 되지 않고 의식마저 잃은 상태였다. 응급차가 멈춰 서고 차 문이 열렸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전화로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들어주고 이끌어준 사람. 최은석 소아종양혈액과 전문간호사였다. 가쁜 숨과 함께 겁에 질린 마음을 쏟아냈다. “제 아들 좀 살려주세요.”  

 

내 아들이 무슨 병이라고요?

현수를 데리고 부산의 종합병원 혈액종양내과에 처음 갔던 날이 생생했다. 학교 건강검진에서 이상 소견이 나오긴 했지만 아픈 곳은 전혀 없었다. 병원 가는 날에도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해운대에 들러 놀다 갈 만큼 에너지 넘치는 아홉 살 소년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혈소판 감소증을 진단받았다. 2개월마다 피검사, 2년마다 골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턴 혈액 수치가 불안정해질 때마다 수혈을 받기 시작했다. 재생불량성빈혈과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수혈 주기가 짧아지면서 이식을 생각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몇 년만 있다가 하면 안 돼?” 현수는 이식받기 싫은 눈치였다. “엄마는 이왕이면 고등학교 가기 전에 했으면 좋겠어.” “그럼 중간고사는 안 보는 거지?” 현수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고등학생인 딸이 반 일치 조혈모세포를 공여하기로 했다. 헌혈 정도라고 생각했던 딸은 목에 카테터를 꽂는 순간부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두 아이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지옥이 있다면 아마 지금일 거야.’ 그러나 진짜 지옥은 이식 후에 나타났다.

 

애타는 나날

이식 후 이튿날부터 현수는 열이 나고 염증 수치가 올라갔다. 환우 카페에서 봐온 예후와는 뭔가 달랐다. 몇 년간 다니던 병원이기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의료진은 이식 직후라 그럴 수 있다면서 “어머니가 너무 부정적인 생각을 하시면 안 돼요”라고 했다. 20여 일을 기다렸다. 하지만 혈액 수치는 뚝뚝 떨어지고 온몸이 부어올랐다. 검사해 보니 골수가 비어 있었다. 분명한 이식 실패였다. 남편은 서울의 대형 병원들을 알아봤다. 서울아산병원에 문의하자 최은석 전문간호사에게 곧바로 연결되었다. 두서없는 질문과 하소연에도 침착하게 설명하면서 두 번째 반 일치 이식을 준비해보자고 했다. ‘최은석 천사님’으로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이미 신뢰는 깊어졌다. 

남편이 서울로 올라가 조직 적합성 검사를 받는 사이, 현수는 기저귀를 찼고 말이 어눌해졌다. 손발에 감각이 없어지더니 의식까지 잃었다. 현수를 응급차에 태웠다. 잘못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서울로 향하는 내내 몇 년 후에 이식하고 싶다던 현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식을 서두른 건 아들의 질병을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엄마의 욕심이 아니었을까. 자책은 끝이 없었다. “현수야 듣고 있어? 엄마가 정말 미안해.” 

 

나의 전부를 맡기며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임호준 교수는 현수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상태로 어떻게 서울까지 온 거죠? 오다가 위험해질 수 있었을 텐데….” “저희도 힘들게 선택한 거예요. 교수님을 만나려고요.” 일단 이식할 수 있는 상태까지 끌어올려 보자고 했다. 현수를 중환자실로 보내고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이 아이를 잃으면 내 세상을 전부 잃는 거구나!’

의료진은 영양 부족에서 비롯된 증후군의 일종이라는 걸 밝혀냈다. 이전 병원에서 이식 후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진작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료받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했다. 어쩌면 이제라도 만난 게 다행이었다. 고강도 비타민 영양제를 처방받은 현수는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뒤 여기가 어딘지 영문도 모른 채 간호사들에게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했다. 하루 한 번 통화할 때마다 현수를 안심시켰다. “엄마 아빠는 병원 주차장에서 중환자실 쪽을 온종일 보고 있어. 무서워 말고 곧 만나자!”

 

놓지 않겠다는 약속

“아직 위험하지만 이 상태로 버티기는 어렵습니다. 이식을 시도해 보죠.” 임 교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현수가 두 번째 이식을 감당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줄곧 현수를 지켜본 최은석 전문간호사는 “잘 될 것 같아요! 그런 기분이 들어요”라고 했다. 체중을 재러 온 조무원은 “현수야, 너는 꼭 나아야 해. 나도 현수거든. 김현수!”라며 웃었다. 미화원은 “오늘 더 건강할 거예요!”라며 인사했다. 사소한 인사들이 확성기를 댄 것처럼 크게 들렸다. 서울아산병원에 오면서 ‘조금만 더 힘내면 될 것 같은데?’라는 기대가 매일 조금씩 커졌다.   

2차 이식은 성공이었고 현수는 조금씩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교수님, 제가 다 나으면 꼭 한 번 업어드릴게요!” “네가 나를 업을 수 있을까? 걷는 연습부터 열심히 해야 할 텐데~.” 그날부터 현수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병동을 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임 교수님 같은 분을 요즘 말로 ‘츤데레’라고 부른다고 했다. 무심한 듯해도 잘 챙겨주는 사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따뜻한 힘이 되어준 의료진이 있어 현수는 온 힘을 다해 땅을 딛고 설 수 있었다.

지난해 9월 30일 부산에서부터 시작된 입원 생활은 해를 넘겨 2월 7일에 마침표를 찍었다. 긴 악몽을 꾼 듯했다. 실감이 나지 않아 현수의 손을 잡아 보았다. 애틋한 행복이 만져졌다. 현수도 힘주어 손을 쥐곤 웃었다. 더는 이 손 놓지 않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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