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두렵지만 함께라면 해보겠습니다 2022.05.02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 임신인데 왜 이렇게 힘들지?’ 심한 입덧과 피로감이 이전과는 뭔가 달랐다. 큰 병원에 가서 정확한 검사를 해봐야 안심할 것 같았다. 임신 24주차였던 2020년 4월,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피검사 결과를 보는 산부인과 이필량 교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김근혜 님의 백혈구 수치가 너무 높아요. 혈액내과 치료를 받아야 하니까 빨리 응급실로 가세요.” 얼결에 입원해서 불과 2~3일 만에 골수 검사와 항암 치료가 이어졌다. ‘내가 혈액암이라고?’ 황망한 마음과 동시에 예고도 없이 며칠째 보이지 않는 엄마를 기다릴 첫째 딸 아인이가 걱정됐다.

 

각오를 다질 시간

독한 항암제를 쓰게 되면서 뱃속 아기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어쩌면 아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둘째 소식에 들떠있던 가족들도 “네 건강이 우선이야…”라며 말을 아꼈다. 판단이 서지 않아 이필량 교수에게 상의했다. “이미 아이의 기관이 다 형성된 때예요. 힘들겠지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같이 해봅시다.” 조심스러운 의견을 듣고 나니 뭔가 명확해진 기분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선택이 아니라 각오였다.

첫째 아이는 친정엄마가 돌봐 주기로 했다. 남편은 일과 살림을 맡았다. 코로나 시국에 보호자 면회도 쉽지 않아 입원 생활 내내 혼자였다. 암 병동에선 볼록한 배에, 산부인과에선 항암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머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됐다. 걱정하는 눈빛이란 걸 알면서도 어디서도 낯선 존재라는 생각에 움츠러들었다. 임산부여서 다른 암 환자들처럼 진통제나 항생제를 투여할 수 없었다. 충수염이 찾아와 2주간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 영양제로만 버티면서 황달까지 겹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병실을 쓰던 환자가 생을 다했던 날, 애써 버티던 마음이 무너졌다. ‘나도 죽을 수 있겠구나….’ 유일한 위안은 매일 초음파로 만나는 아이의 심장박동 소리였다. 초음파를 봐주던 방사선사는 “저도 혈액암 산모는 처음이라서 교수님께 뭘 중점적으로 봐야할지 여쭤봤는데요…”라며 관련 정보를 나누고 말벗이 되어 주었다. 늦은 밤 남편에게 전화해 힘든 순간을 털어놓다가 문득 이런 말이 나왔다. “근데 이 병원에 있는 한 나랑 아기에게 큰일은 없을 것 같아! 그런 예감이 들어.” 

 

대견한 나, 그리고 다인이

항암과 항암 사이의 기간이 길어지면 재발률이 높아졌다. 혈액내과와 산부인과 의료진은 최적의 출산일을 상의하고 촘촘하게 치료 일정을 계획했다. 최대한 출혈과 위험 요소가 적은 자연분만으로 출산하기로 했다. 7월의 출산 예정일이 되자 그동안 부쩍 가까워진 방사선사가 아침 일찍 귀여운 아기 옷을 들고 찾아왔다. “오늘이 출산일 맞죠? 잘하고 오세요! 아이는 건강할 거예요. 우리가 지켜봤잖아요!”

유도 분만으로 무사히 둘째 다인이를 만났다. 그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건강한 모습이었다. “대견해요, 정말 대견해.” 이필량 교수의 토닥임에 눈물이 쏟아졌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남편도 울먹였다. “이렇게 예쁜 아이도 태어났으니까 엄마가 건강해야지~.” 큰 고비 하나를 넘기고 이제는 혈액암을 이겨낼 차례였다. 

 

나를 안심 시킨 병원

산후조리를 할 틈도 없이 두 번째 항암을 시작했다. 항생제와 진통제를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홀가분했다. 잘하면 항암으로 치료가 종결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결과는 들리지 않았다. 제대혈 이식을 준비해야 했다. 기증자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기쁘면서도 막상 이식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렵고 떨렸다. 아기와 떨어져 지내는 것도 서러운데 하필이면 입원 날짜가 생일날이었다. 병원 지하의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밀면서 감정이 북받쳤다. 첫 번째 항암 후 조금 자란 머리카락이 반가웠는데 또다시 원점이었다.    

“이식은 저에게도 두려운 일입니다.” 이식을 앞두고 혈액내과 이제환 교수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인간적인 그 한마디가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유능한 의사이면서 실력에 자만하지 않고 환자와 함께 두려워할 줄 아는 분이구나!’ 무균실에 들어갈 때도 통증과 고열, 폐소 공포를 호소하자 이 교수는 “힘들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도록 할게요. 일단 치료부터 받아 봅시다”라며 안심시켰다. 매일 잘하고 있다는 칭찬에 하루하루를 버텼다. 골수가 몸에 생착되기까지 2개월 내내 온몸이 아팠다. 첫째 아이의 유치원 사진을 받아볼 때마다 아이가 느낄 엄마의 빈자리를 상상하면 마음도 아팠다. “우리 아인이 머리를 이렇게 묶어주면 어떡해….” 할머니와 아빠의 서툰 솜씨가 왜 그리 서운한지, 딸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모든 순간이 미안했다. ‘엄마가 얼른 이겨낼게!’

 

죽을힘을 다한 끝에

“1년간 큰 문제가 없으면 재발률이 낮다고 하셨죠?” 이식 후 1년째 되는 날의 진료였다. 들뜬 기대에 화답하듯 평소 진중하던 이제환 교수가 밝게 웃었다. “그랬죠. 이제 한시름 놔도 되겠어요.” 재발의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도 회복의 일부분이었다. “그동안 교수님께 고마운 게 참 많았는데….” 쇼트커트 스타일로 자란 머리를 괜히 손으로 헝클며 얼렁뚱땅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이식하고 나면 면역력이 제로 상태가 된다. 지난 1년간 둘째 다인이와 각종 예방 접종을 함께 해왔다. 주사 맞고 우는 딸을 달래면서도 모녀가 나란히 붙인 뽀로로 밴드가 귀여워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다인이 아픈데 엄마가 자꾸 웃어서 미안해. 신생아가 된 엄마 좀 이해해 줘!” 사실 항암과 출산, 이식을 모두 겪고 나면 크게 달라진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작은 일에도 화가 나고 좌절한다. 그래도 건강과 가족이 있다는 게 매 순간의 위안이 된다. 정말이지, 죽을힘을 다해 얻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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