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2022.07.12

 

“새영아, 엄마를 꽉 잡으라니까.” “그게 안 되니까 그러지!” 변기 앞에서 끙끙대던 모녀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선천성 사지 결손 장애로 오른쪽 팔다리 일부가 형성되지 않은 새영이는 얼마 전 18번째 하지 길이 연장술을 받았다. 팔 수술도 병행해서 변기에 앉을 때조차 엄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힘이 예전만 못한 60대 엄마와 한창 예민해진 10대 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게, 엄마는 왜 나 같은 애를 입양했어요?” “너니까. 네가 예뻐서!”  

 

가족이 되어 줄래?

“엄마, 눈에 밟히는 아이가 있어.” 2009년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둘째 딸이 실습에서 만난 아이 이야기를 자꾸 꺼냈다. 이름은 안지영. 생후 6개월부터 시설에서 자란 여섯 살 여자아이였다. 마침 가까운 대학에서 열리는 여름 캠프에 온다는 말에 엄마는 간식거리를 들고 찾아갔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도 밝은 표정의 지영이를 엄마는 단번에 알아 보았다. 지영이는 둘째 딸을 따라서 서슴없이 “엄마”라고 불렀다. 그 뒤로 매주 금요일 오후면 지영이를 집에 데려와 함께 지내다가 일요일 저녁에 시설로 데려다주기 시작했다. 1년간 한 주도 빠진 적이 없었다.

처음엔 후원 정도의 역할을 생각했다. 문제는 머리보다 마음이 앞서가 있었다. 지영이가 매주 버려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아닐까, 더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해 밝은 성격이 꺾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헤어질 때마다 온 가족이 눈물바다였다. 입양하기엔 지영이의 중증장애보다 50대의 부모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같이 키우면 되잖아!” 대학생인 두 딸의 응원에 부부는 용기를 냈다. 마음앓이를 끝내고 진짜 가족이 되기로 했다. 지영이는 가족의 성과 돌림자를 딴 ‘홍새영’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제는 같이 해

2010년 12월. 입양 수속을 마치자마자 수술 일정이 기다렸다. 시설의 중증장애아들은 서울아산병원의 치료 지원을 받고 있었다. 가정 환경이 달라진 새영이의 지원 여부가 불투명했다. 하지만 병원은 입양 직후임을 배려해 지원을 이어갔다. 엄마는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박수성 교수에게 새영이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정상 속도로 자라는 왼쪽에 비해 오른쪽 팔다리가 훨씬 짧고 가늘었다. 매년 상하지 길이 연장술과 하지 변형 교정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 후에도 3개월간 하루 4번 정해진 시간에 다리뼈에 장착한 나사를 돌려야 했다. 그러면 매일 1mm씩, 1년에 최대 3cm까지 다리뼈를 늘릴 수 있었다. 피부는 쉽게 찢어져 항상 상처투성이였다. 다리에 난 구멍을 매일 소독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새영아, 넌 어쩌면 이렇게 힘든 걸 티도 안 냈어?” “시설에는 휠체어도 탈 수 없는 친구들이 많아서 내가 아픈 건 별 거 아니었는데….” 새영이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엄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픈 건 못 덜어줘도 사랑은 듬뿍 줄게!” 

늘 씩씩한 새영이도 무서운 게 있었다. 수술실과 마취를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린다며 수술실로 이송될 때까지 눕지도 못했다. 수술실 앞에서 아이를 달래는 엄마를 본 의료진이 말했다. “어머니가 수술실에 같이 들어가서 안심시켜주세요.” “정말 그래도 되나요?” 덕분에 새영이는 마취될 때까지 엄마 손을 꼭 잡을 수 있었다. “엄마 어디 가면 안 돼.”  

 

새영이의 오랜 가족

겨울 방학은 항상 서울아산병원에서 보냈다. 엄마보다 더 오랜 인연이 쌓인 곳이었다. 진료실에 가면 박수성 교수는 “지영이 왔구나!”라며 예전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새영이가 교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를 엄마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수술해 나가면 조금씩 좋아질 겁니다.” 무뚝뚝한 말투에 담긴 점점 나아질 거라는 희망은 새영이를 장애에 연연하지 않게 했다.

병동에는 ‘병원 엄마’라고 부르는 감민재 간호사가 항상 있었다. “새영아, 시험 잘 보고 왔어?” 물으면 새영이는 그간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바빴다. 간호사들은 새영이가 그린 그림을 투명한 환자 파일의 겉면에 꽂아 두었다. 새영이만 알아볼 수 있는 신호였다. “나중에 미술 공부해 봐!” 간호사 선생님들의 응원에 새영이는 수십 장의 그림을 그렸다. 무료한 오후에는 신관 1층으로 ‘정주영 할아버지를 보러’ 갔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엄마, 이거 알아요?”하며 자신 있게 앞장섰다. 할아버지에게 누누이 들은 옛날이야기인 것처럼 사진마다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학교와 병원을 오가면서 새영이는 열여덟 살 여고생으로 성장했다. 이제 두 다리의 길이 차이는 3.5cm에 불과하다. 의료진의 약속대로 마지막 수술만 받으면 더 이상 굽 높이 보조기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 오른쪽은 늘 보조기를 착용하느라 새 신발을 사도 오른쪽 신발은 쓸모가 없었다. 양발에 같은 운동화를 신을 수 있다는 건 힘겨운 수술을 거듭하며 기다린 기적 같은 일이다.

 

살면서 배워가는 것

새영이는 언니들을 따라 유럽 여행도 가보고, 멋진 두 형부도 생겼다. 엄마는 운영위원회 활동을 통해 학교에 장애 시설을 갖춰 나갔다. 지난해에는 항상 등하굣길에 픽업해주던 아빠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다. 기쁠 때 함께 기쁘고, 슬퍼도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경험들이 쌓였다. 장애와 입양. 주어진 길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새영이는 만족스럽게 걷는 방법을 배워갔다.

오랜만에 병원 가는 날, 엄마는 익산에서 서울까지 운전하는 중에 깜빡 잠이라도 들까 봐 긴장했다. 운전의 피로나 노화의 증상을 새영이는 아직 알 턱이 없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새영이의 수다에 서울아산병원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새영아, 이제는 네가 엄마를 돌보는 거 같다. 고마워, 내 딸!” “에이~ 우리 사이에 닭살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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