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아산인 이야기 먼저 찾고 먼저 발견하기 2021.11.26

외과간호2팀 옥수정 사원

 

 

시간은 힘들수록 천천히 흘러간다는데 입사 후 나의 1년은 총알 같았다. 부모님의 울타리를 떠나 세상에 홀로 선 사회 초년생에게 현실은 낯선 질감으로 살갗에 와 닿았다. 낯선 도시의 단칸방은 생각보다 쓸쓸했고, 병원 일은 벅찼다.

 

실제 임상은 어깨 너머로 보던 실습과는 전혀 달랐다.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시각 자료나 실습용 인형이 아닌 진짜 생명이었다. 그 사실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부담감은 점점 중압감이 되었고, 온전히 환자를 치유하는 행위로서의 내 일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두운 새벽녘에 근무를 나서며 눈물을 머금었던 기억도 있다.

 

환자나 보호자가 직원에게 보내는 ‘칭찬 카드’ 제도가 있다. 정성으로 환자를 대한 사람의 메일함에는 그들의 소중한 마음이 날아들곤 했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도 각자의 메일함에 하나 둘씩 결실을 쌓아 갔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두 번의 계절이 지나 겨울이 올 때까지도 내 앞으로 날아온 칭찬 카드는 없었다. 힘들어도 미소 짓고 환자들과 소통했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경청했다 믿었는데…. 회의감이 들었다. 꼭 칭찬 카드를 받아야만 내 마음이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속상한 마음은 떨쳐낼 수 없었다. 환자에게 이름 석 자를 기억시킬 수 없는 간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의 시작과 동시에 나는 앓아 누웠다. 지독한 몸살 기운이었다. 당연히 추운 날씨 탓이었겠지만 어쩌면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르는 새에 냉기가 스며 버린 내 몸만큼이나 마음도 곪아 있었다는 것을 병상에 눕고 나서야 깨달았다.

 

간호사가 아닌 환자로서 찾은 병원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병동은 어수선했고 사람들은 바빴다. 그곳에서 나는 가만히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망망대해의 섬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열이 끓어도 그저 버텨야만 했다. 진통제를 주겠다던 간호사의 약속은 지연에 지연을 거듭했고, 기다림은 점점 불쾌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머리로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했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몸이 아픈 환자에게 자신보다 우선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건강을 되찾고 다시 간호사로 복귀하는 출근길, 내 마음속에는 한 가지 다짐이 있었다. 입장을 바꿔 보기 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다짐이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먼저 찾고 먼저 발견하기. 환자가 불편을 호소하기 전에 내가 먼저 간호 수요를 찾고 공급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스스로 먼저 행동하려니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만큼 나를 믿고 따라 주는 환자들도 많아졌다. 이제 더 이상 두 번씩 요구 받는 상황은 없었다. “선생님이 알아서 잘 해주시겠죠.” 어느 환자의 따듯한 한마디는 나를 더 열정적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그 분이 퇴원하시던 날 내 두 손에 작은 쪽지 하나를 쥐여 주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내 이름이 적힌 감사 두 줄. 나는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집에서도, 잠들기 전에도 쪽지를 꺼내 읽었다. 그것이 내게 날아온 첫 칭찬 카드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소중한 환자. 내 손을 꼭 쥐었던 그 할머니의 손길을 아직도 기억한다. 여전히 내 책상 서랍에는 그때의 쪽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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