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나의 네 번째 심장' 비대형 심근병증 완치 후 임신했어요. 2024.09.27

나의 네 번째 심장으로 찾아온 새로운 생명

 

 

울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웠다. 수술실에 누워있는 순간까지 누군가의 심장을 이식받아 살아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열여덟 살의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말이다. 대뜸 의료진이 좋아하는 가수를 물었다. 울다가 얼결에 답했다. “2pm이요.” 곧 익숙한 노래가 수술실에 흘렀다. ‘Can you feel my heart beat~’ 어느새 속으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심장이 고장 났다는 노랫말에선 큭- 웃음도 터졌다. “가영 님, 잠깐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거예요.” 두 번째 심장과 무사히 만나기를 바라며 곧 깊은 잠이 들었다.


 
병원에서 알게 된 것들      
어릴 때부터 나는 유독 약한 아이였다. 금방 숨이 차고 기진맥진한 나를 두고 동네 어르신들은 ‘얘가 하도 기운이 없어서…’라고들 했다. 고등학생이 되자 움직이는 게 버거워졌다. 학교에 빠지는 날도 늘었다. 뒤늦게 찾아간 병원에선 비대형 심근병증이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라고 했다. 방법은 심장 이식뿐이었다. 이식을 기다리며 열여덟 살의 여러 날을 집에서만 보내야 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직후 아픈 건 물론이고 적막한 무균실에서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것도 처음이었다. 의료진이 건네는 인사와 농담 한마디가 기다려졌다. 사람의 온기는 하루를 버틸 용기가 되었다. 유리창 너머 할아버지 환자에게 틈틈이 손 인사를 건넸다. 나름의 생존 신고이자 구호 신호였다. 침상에서 내려와 처음 걸었을 때 흠칫 놀랐다. 전혀 숨이 차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물 한 잔 먹고 싶을 때에도 ‘가기 너무 힘든데…’라며 한참 망설였었다. 
하고 싶은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건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마음마저 숨 차오를 때      
누군가의 심장으로 살아간다는 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아침저녁으로 면역억제제를 먹으면 위를 손톱으로 긁는 듯이 무척 아팠다. 그리고 1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워낙 밝고 눈치가 빨라 어디서나 ‘일 좀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해진 일과와 책임이 따르는 사회생활을 지속하긴 어려웠다. 단념해야 할 것도 하나둘 늘어서 누군가를 소개받으면 지레 ‘나는 심장이식을 받았고 앞으로도 치료가 필요하며 아이를 낳지 못할 수 있다’고 선전포고하듯 설명했다. 그런데도 옆에 있어주는 남자를 만났다. ‘이 사람이라면…’이라는 확신에 결혼까지 결심했다. 다만 상대 부모님에게 승낙을 받기 위해 설득하고 또 설득해야 했다. 요즘은 의술이 좋아져서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동안의 부담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혈관 거부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 이식 후 10년 만이었다. 재이식을 받아야 하니 빨리 입원해야 한다는 심장내과 김재중 교수님께 딱 한두 달만 버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결혼식 때문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식장에 혈관확장제를 들고 입장했다. 결국 부산으로 떠난 신혼여행에선 잘 걷지 못하고 조금만 먹어도 쓰러졌다. “오빠, 나 이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조금 특별한 신혼 생활     
이식을 기다리며 기약 없는 입원 생활이 시작됐다. 남편은 주말마다 나를 보러 서울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이식된대?”라고 묻는 대신 “뭐 먹고 싶어?”라고 묻는 남편 덕분에 애틋한 신혼 기분이 났다. 남편이 만들어 온 음식을 먹으며 밀린 수다를 떠는 주말이 기다려졌다. 병동 사람들도 나를 “새댁”으로 불렀다. 남편 없는 평일에는 간식을 잔뜩 쌓아 놓고 의료진에게 나눠주며 소소한 재미를 찾았다. “오늘 진짜 힘들었어요”라며 찾아와 마음을 털어놓고 가는 간호사들과 환자들도 있었다. 


잘 지내다가도 불쑥 지치는 순간이 찾아왔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내가 나이가 들어서~”라며 우는소리를 할 때면 ‘저 나이까지 건강하게 사셨으면 감사한 거 아닌가?’ 괜한 심통이 났다. 또 나보다 나중에 온 환자가 “나 먼저 이식받으러 가요”라며 인사하면 조금은 부럽고 서운했다. 나를 기다려주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자 의지가 됐다. 어느 날 수간호사님이 찾아왔다. “가영 씨 준비해요. 오늘이야!” 입원 생활 1년째, 드디어 이식받고 집에 돌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남편에게 전화했다. 오늘 같은 날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대답을 듣자, 심장을 기증한 누군가는 사랑하는 가족과 영영 이별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기뻤던 마음이 미안함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제게 나눠주신 생명을 잘 관리해서 매일 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선물      
“교수님, 제가 일을 냈어요.” 두 번째 이식 후 5년이 지난 지난해였다. 임신을 확인하고 김재중 교수님께 바로 연락했다. 심장에 타격이 있을까 봐 교수님이 늘 염려해 온 상황이었다. 그때마다 “교수님이 제 뒤에 계시는데 뭘요~” 자신만만해 했다. 실제로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고 불안하기보다는 누군가의 생명을 신세 져 온 내게 새로운 생명이 찾아온 사실에 한없이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내가 만난 네 번째 심장이었다. 김 교수님은 열여덟 살에 만난 가영이가 엄마가 된다며 항상 조심스럽게 살피고 주의할 점을 알려주었다. 반면 산부인과 원혜성 교수님은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힘내야죠!”라며 파이팅이 넘쳤다. 두 분의 걱정과 응원은 결국 같은 마음이었다. 든든해진 마음으로 2024년 3월 20일 예준이를 무사히 품에 안았다.  


한때는 ‘나만 왜 이렇게 아프지? 당장 내일의 나를 왜 걱정해야 하지?’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의 막막함과 두려움이 있었기에 두 번의 이식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순간에 더 큰 감사가 있었다. ‘심장 이식 환자’로 설명되던 내가 ‘예준이 엄마’로 불리는 요즘, 매일 매 순간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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