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아산인 이야기 [특별 인터뷰] 푸른 숲, 너른 품에 담은 희망… 정영선 조경가를 만나다 2024.10.25

푸른 숲, 너른 품에 담은 희망

서울아산병원 중앙공원 설계한 정영선 조경가 인터뷰 

 

▲ 지난 9월, 정영선 조경가가 서울아산병원 중앙 공원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있다

 

 

울고 싶고, 쉬고 싶을 때 우리는 중앙 공원의 나무숲을 찾는다. 병원 대지 면적의 약 33%를 이루는 숲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9월 23일, 이곳을 설계한 정영선 조경가를 직접 만나 물었다. 환자와 가족, 의료진에 필요한 자연의 조화 기능을 깊이 고민한 과정과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쉼과 생명이 기다리는 숲으로

가을볕이 무르익으면서 중앙 공원은 울긋불긋한 숲과 북적이는 사람들로 생기를 더했다. 씩씩하게 뻗은 활엽수가 배치돼 생명력 가득한 중앙 공원의 직선 코스를 지나면 신관 옆쪽에 곡선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재미가 기다린다.

 

정영선 조경가는 숲 속 곳곳에 뜨개질을 하거나 도시락을 먹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상상하며 그린 숲의 모습 그대로”라면서 “이른 봄부터 움트는 수목을 심어 병실에서 나오지 못하는 환자도 창밖을 보며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품게 하자. 그리고 아픈 사람은 와서 울고, 지친 환자 가족은 위로를 받고, 시간과 싸우는 의료진은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울창한 숲을 이뤄 그늘에 앉게 하자. 두 가지 원칙을 세우고 작업했습니다”라고 했다.

 

계절의 변화와 소리, 빛,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수종을 기반으로 화목류, 초화류 중심의 식재를 선정하고 거칠고 원생적인 자생 풀과 건강목인 소나무 등을 심어 조화롭고 활기찬 수림을 일궜다. “조경은 환경과 건축에 따라 달리 설계해야 합니다. 저는 이곳이 그저 예쁘고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위로와 재충전의 공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정 조경가는 현대 관련 여러 조경 프로젝트를 작업한 인연으로 2007년 신관 건축팀의 조경 설계 자문을 요청받았다. 건물 전면부에 한정된 조경과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 도면을 본 첫 느낌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우려였다.

 

“법적 조건에만 맞추면 병원에 조경이 있어야 할 의미가 사라져요. 자연에는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설계안을 드릴 테니 맡겨 주시겠어요?’ 물었더니 바로 승낙해 주셨어요. 열심히 구상한 내용을 어떻게든 설득할 각오였는데 병원에선 어떠한 간섭이나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참 복 받은 조경가죠.(웃음) 결과가 나쁘지 않았는지 건물의 전면부 정도였던 1차 설계 이후에 2차, 3차 확장 설계를 의뢰해 주셨어요.”

 

 

삶과 사람에 대한 생각을 도면에 담다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의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를 평생의 가치로 여기며 한국을 대표하는 공원과 광장, 상업시설의 조경을 다수 설계했지만 병원 조경은 언젠가 도전하고 싶은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죽음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환자와 가족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면 위로가 될까. 오랜 질문을 조경에 풀어내고 싶어서였다.

 

“어릴 때 동네에 있는 병원을 지나다니면서 환자들의 고달픈 삶을 보게 됐어요. 생사에 대한 진한 잔상이 남았죠. 후에 그 병원을 꾸며드리면서 옥상에 텃밭을 만들었는데, 병원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던 제 어머니가 늘 그곳에 가 계시더라고요. 환자들이 어떤 걸 찾고 원하는지 알게 됐죠.”

 

우리 병원의 자문을 의뢰받았을 때 직접 설계에 나선 것도 개인적인 경험에 기인했다.

 

“남편이 꽤 오랫동안 앓으면서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어요. 그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어느 병원엘 가도 몰래 울 자리가 없고 쉴 자리가 없는 거예요. 심지어 요양 병원에선 병실 창문으로 화장장이 보였어요. 환자가 종일 누워서 그걸 보고 있으니 가족으로서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지…. 그런 경험 없이 제가 설계만 해온 사람이었다면 이 공원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겁니다.”

 

 

오랜 지식과 경험이 응집된 서울아산병원의 조경은 그를 소개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대표작이 됐다. 영화 ‘땅에 쓰는 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등에도 언급되면서 대중에 조경의 개념과 기능을 각인시키는 매개체가 됐다.

 

“이곳을 설계한 후로 다른 병원의 의뢰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대부분 환자가 휠체어를 끌고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거나 경사진 공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넓은 땅을 환자나 가족, 의료진에게 제공하는 서울아산병원의 용단이 요즘 시대에는 기적처럼 느껴져요. 공원 부지에 건물을 지을 수도 있고, 지속적인 관리에 필요한 비용과 인력을 다른 데 쓸 수 있잖아요. 여기만큼 이상적인 병원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조경가로서, 내원객으로서 정말 고마운 일이죠.”

 

 

“환자의 고통과 설움, 의료진의 생사에 대한 압박감…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딱한 사연이 병원에 얼마나 많아요.
숲에 나와 한껏 울면서도 ‘살고 싶다, 이겨내고 싶다’라는 의욕이 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내게도 그런 곳이 절실한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숲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여든을 넘겨서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는 공원을 걸으며 눈에 띄는 잔가지를 한데 모으고 잡초를 직접 정리했다. “조경가는 매일 땅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만지며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의료진분들도 그렇죠?” 쭉 뻗은 나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무성해진 가지를 대대적으로 다듬어 주길 당부하면서 그래야 ‘나도 힘내서 살아야지!’하는 기운이 전달될 거라는 이유를 덧붙였다.

 

병원에서 조만간 숲 해설가와 함께 숲의 계절감과 생명력을 들여다보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할 거라는 이야기에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자연은 이른 새벽과 오전, 오후, 밤이 각기 다릅니다. 무시로 변하는 풍경을 예측해 디자인했으니 개인의 취향대로 싹이 틀 때, 꽃이 시들 때의 감격과 감동을 찾아보세요. 스스로 숲으로 나왔기에 얻는 위로가 있을 겁니다.

 

 

 

정영선 조경가196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1973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로 입학해 한국의 조경설계 분야를 이끌어 온 조경가다.
예술의전당, 광화문광장,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선유도공원, 서울식물원 등 굵직한 조경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2007년 서울아산병원 조경 설계를 맡아 계절성과 생명력이 돋보이는 숲 공간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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