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근 교수는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면의 의미를 더듬는다.
환자의 환경과 정서기질 등을 세심히 반영해 진단의 정확도를 높이면 이후의 치료 과정은 그만큼 빠르고 효과적이다.
반드시 나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환자와 어두운 마음의 터널을 함께 걷고 있다.
답을 찾아 길을 만들다
“의공학자를 꿈꾸며 공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공부할수록 공학 기술보다 생명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 적성에 맞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을 맞대며 일하고도 싶고요. 학부를 졸업하고 의대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다루는 정신의학에서 신비한 매력을 느꼈다. 기분장애와 자살을 주전공으로 삼은 건 전공의 1년 차 때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파견 나간 정신병원에 음독을 시도한 젊은 환자가 전원 왔다. 교과서에 나온 대로 병력을 확인하고 최근의 자살시도력을 감안해 안정병동 입원을 진행했다. 자살 위험 집중 관리 처방을 내고 퇴근한 이튿날, 환자는 자살로 사망했다. 자살 예방을 위해 할 수 있었던 모든 개입이 결국 불완전하다는 의미였다.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배운 것이 완성된 지식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됐어요. 어떤 식으로 개선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자살 고위험군의 특성을 학위 논문 주제로 삼게 됐죠. 자살 행동을 보이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연구하고 싶은 저에게 우리 병원은 최적의 환경이었습니다. 특히 정신치료 비중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도 정신치료를 강조하며 스트레스심리상담센터 등을 통해 환자들에게 좋은 치료 환경을 제공하는 병원이니까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환자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떤 말이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및 인지행동치료의 수련과 임상 경험을 쌓으며 익혔다. “제 완벽주의적 성향은 첫 면담부터 꼼꼼하게 병력을 청취해 명확한 진단을 내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습니다.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환자분들에게 기분장애는 반드시 나을 수 있다는 걸 강조하며 전체 치료 과정을 제시하고요. 환자 입장에선 환기 창구로서 힘든 마음을 털어놓는 게 진료의 우선순위일 텐데, 환자 상태를 명확히 그리기 위해 조금 더 의학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는 제 접근법이 아쉬우실 수도 있어요. 균형을 찾아가야죠.”
정확한 진단에서 만나는 지름길
박 교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되도록 ‘우울증’이라는 말을 기피한다. 우울증이라고 일컫는 질환은 크게 우울장애와 양극성장애로 나뉘고, 그 안에서도 다양한 아형을 포함하고 정서기질에 따라서도 여러 타입으로 나뉜다. 이를 간과하면 치료 성과와 기간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우울장애로 항우울제를 복용하다가 차도가 없어서 우리 병원을 찾은 환자들 중에는 양극성장애를 진단 받고 기분안정제를 복용한 후에 낫는 경우가 매우 많다.
“양극성장애는 제대로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평생 갈 수 있기 때문에 초진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진단을 내립니다. 재진 때도 우울장애에서 양극성장애로 전환되지 않았는지, 우울장애라고 생각했는데 약물 반응이 예상과 다르다면 양극성장애의 소인을 가진 환자인지 면밀히 확인하죠.”
충분한 용량으로 충분한 기간에 걸쳐 치료하되, 안정적으로 지내는 게 확인되면 상의를 거쳐 반드시 치료 중단을 시도한다. 박 조교수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치료와 그렇지 않은 치료, 현실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치료를 구분해서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전원을 결정하는 것까지 좋은 치료자의 역할로 여긴다. “환자분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듣는 게 쉽지 않지만 몇 주, 몇 달이 지나면 분명히 나아지거든요. 그 변화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래서 제 천직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박 교수는 우울해지면 우울한 내용을 더 잘 기억하거나 더 우울한 내용으로 주의가 편향되는 특성을 사용해 우울장애나 양극성장애를 진단하고 감별하는 도구를 개발하고 있다. 무의식 속에도 객관화하고 정량화할 수 있는 잘못된 인지 체계들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류에 따르기보다 관심사를 깊이 있게 파고들어 적어도 제 분야에서는 환자분들께 확신을 드리고 싶어요.”
마지막 세션을 대하는 마음
약물 처방 이외에 심리적 개입이 필요한 경우에 진행되는 정신치료는 매주 45분씩 보통 1년 이상 진행한다. 환자 자신조차 모르던 오랜 마음의 고통이나 무의식적 갈등을 알게 되면서 변화가 생기고 치료 종결로 이어진다. “마지막 세션에 환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긴 시간 기울였던 노력을 떠올리면 저도 기쁨과 존경, 앞으로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해지며 매번 울컥하는 마음이 듭니다.”
병원에 잘 오셨다는 인사로 시작하는 첫 진료부터 건강하게 잘 사시길 바란다며 응원하는 마지막 진료까지. 그는 환자들이 고민 없이 자신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의사가 되기를 소원한다. 치료 과정은 차분하게 이끌지라도 병이 생기기 전의 모습,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 전의 모습으로 환자를 되돌리기까지 그의 속마음은 늘 간절하고 치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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