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큰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지 않을까? 높은 중증도에 익숙해지지 말고 환자복 너머 환자의 삶을 생각하자.’
병원에 입사할 때 환자의 진단명이 아니라 환자 자체를 간호하자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그래야 내가 환자 간호를 지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급성기 환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을 일일이 생각하며 간호하기는 쉽지 않았다. 심지어 환자의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한 채 뛰어다니기 바빴다.
그러다 문득 초심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병동에서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환자들의 그전 모습은 어땠을지 상상해 봤다. 일상생활 중 갑자기 증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은 환자, 수년 동안 이미 여러 병원을 거쳤지만 결국 치료가 되지 않아 온 환자….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환자들을 간호할 때 무엇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까? 빠른 간호 처치일까 아니면 환자 상태 변화를 빨리 알아차리는 것일까? 환자들이 제일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환자복 너머 환자들의 삶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로 다시 마음먹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동은 임종기 환자가 많다. 1년 전 간질성폐질환이 악화돼 임종기에 접어든 환자가 있었다. 의식 수준이 명료해 간호사들이 하는 말도 다 들렸을 것이고, 여러 명이 왔다 갔다 하는 처치실에서 삶을 마무리하게 된 상황이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는 삶을 정리하며 호흡수가 1분 동안 30~40회인 와중에도 담당 간호사들에게 웃으며 그동안 감사했다고 얘기했다. 소음이 많은 곳에 계시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간호사들이 인계하고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젊었을 때 생각이 난다며 웃어 보였다. 그날 환자는 녹음기로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겼고 다음 날 눈을 감았다. 겉으로는 덤덤히 간호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삶을 정리하던 모습에 인간으로서 존경스러웠고 담당 간호사로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감사했다. 병원에서 보내는 작은 기억 하나도 서럽거나 외롭게 느끼지 않도록 앞으로 환자에게 더욱 세심하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난히 중증도가 높은 환자들이 많던 어느 날, 저녁 약으로 기침 가래 완화제 한 개만 투약하면 되는 환자가 있었다. 투약확인 기계로 환자의 팔찌와 투약카드를 대조하고 “저녁 식사 마치면 드세요”라며 기계적으로 약을 전달했다. 빨리 처치실에 가서 다른 환자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투약카트를 돌렸는데 환자가 나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오늘도 건강을 주셔서 감사해요.” 그제야 비로소 나는 그 환자의 얼굴을 그날 처음 제대로 봤던 것 같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제가 감사해요”라고 얘기하자 환자는 나에게 식사는 꼭 하면서 일하라고 말했다.
환자들이 통증과 호흡곤란 등으로 예민할 수 있지만 그동안 담당 간호사인 나에게 화살이 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담당 간호사의 끼니를 챙기는 따뜻한 마음의 환자들이 많았다. 그 마음이 나에게 닿을 때마다 환자분들이 얼른 환자복을 벗고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빌 뿐이다. 아직 완전한 간호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언제나처럼 환자복 이전의 환자의 삶이 어땠을지, 이후의 삶은 어떻게 보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간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