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 중증 희귀질환 신생아 이야기 2025.02.21

세 번째 아이를 갖고서야 건강은 당연하거나 공평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임신 기간에 태아의 늘어난 방광과 요로계 질환으로 서울아산병원에 온 이후 양수주입술, 방광-양막 션트, 태아 방광흡인술 등이 이어졌다. 
고위험 산모집중치료실에 있으면 빨리 출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야 이 고통도 끝날 테니까. 
31주 차에 드디어 아이를 만났다. 2.1kg의 작은 아이는 숨이 가쁘고 피부는 괴사한 듯 보였다.

‘너 역시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버틴 거구나!’ 험난한 앞길이 그려졌지만 나는 확신했다. 이 아이의 삶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이별을 준비하기엔 너무 일러  
에스더는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MYH11 유전자 이상으로 발생한 MMIHS(거대방광-미세결장-장연동저하 증후군)를 확진 받았다. 전 세계에 다섯 사례만 보고된 매우 드문 질환이라고 했다. 1세 이상 생존하는 경우가 적고 근본적인 치료법도 없었다. 배뇨가 원활하지 않아 소변줄을 달고 음식물의 소화와 흡수가 불가능해 정맥으로 영양을 공급했다. 잦은 감염과 패혈증, 담즙정체증과 요로 감염 등이 이어졌다. 복수를 제거하는 시술도 여러 차례 진행됐다. 매일 위기였고 과연 치료를 유지하는 것이 아기를 위한 길인지 의료진조차 고민하는 듯했다. 연명치료중단 동의서를 받아 든 남편은 살릴 방법이 있다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며 혼란스러워했다. “부모도 아니고 내 아이의 마지막을 어떻게….” 즐거운 놀이동산을 상상하며 아이를 세상에 입장시켰지만 실은 폭풍우 속 바다 한가운데였다. 의료적 조치를 설명하는 신생아과 정의석 교수님의 목소리도, 동의서에 사인하는 남편의 손도 떨렸다.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포기는 아니었다. 서로 어려운 결정의 증인이 되어 언제일지 모를 끝까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자는 무언의 결의와 같았다. 


우리는 병원에 있는 에스더의 건강을 매일 기도하면서도 불시의 연락에 대비해 벨소리를 가장 크게 높이고 핸드폰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은 날도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내내 남편은 마지막을 예감한 듯 울었다. 오히려 나는 담담했다. “아이를 직접 보기 전까지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 안 해.” 역시나 걱정했던 일은 에스더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멀리 있어도 
보존적 치료를 유지하기 위해 신생아중환자실2로 옮기며 이하나 교수님으로 주치의가 바뀌었다. 힘든 시간을 보낸 에스더는 감염과 복수가 호전되면서 컨디션이 나아졌다. 이 교수님은 조금 더 편안하게 보존적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추가 치료를 제안했다. 매번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는 게 느껴졌다. 어떤 부분을 염려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남편은 가장의 책임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다. 스물네 살에 가정을 이루고 결혼 7년차. 두 아들을 낳고 안정을 찾아갈 때쯤 셋째가 찾아왔다. 예기치 않은 상황들로 임신 기간부터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입원이 반복되자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었고 두 아들을 언제든 맡길 수 있는 친정 근처로 이사했다. 에스더의 질병은 진단명조차 없어 치료비를 지원받을 길이 막혀 있었다. 남편은 때로 막막한 심정을 의료진에게 쏟아내기도 했다. 사실 지친 마음을 알아줄 곳이 의료진밖에 없었다. 우리 가정의 어려움을 먼저 살핀 교수님은 사회복지팀에 연락해 주었고 각종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목요일마다 에스더를 만나러 왕복 10시간을 달렸다. 주어진 시간은 30분. 남편과 나는 15분씩 번갈아 노래를 불러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동자만 움직이던 에스더는 조금씩 고개를 가누고 물건을 잡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도 알아보았다. 짧은 만남이 아쉬운 우리에게 간호사 분들마다 에스더의 지난 일주일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이번 주엔 바운스를 했어요.” “재활 선생님을 무척 좋아해요.” “오늘 아침에 주사를 맞아서 기분이 안 좋아요~” 처음엔 환아 가족에 대한 배려이자 응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스더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도 그 사랑에 물들어 집에 돌아가면 일주일을 버틸 힘이 났다. 오랜 기도가 식지 않았다. 멀리 있어도, 보이지 않아도 에스더가 더 나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 

 

 

 

 

더 긴 만남을 위해 
완치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 교수님은 에스더가 가능한 집으로 갈 수 있는 방향의 치료 여건과 가능성을 찾아나섰다. 연고지에서 가까운 병원이나 식이 진행이 가능할지 등을 고려해 수술적 치료와 가정간호 교육을 제공하는 병원에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1월 2일 전원을 결정지었다.


전원을 앞두고 에스더의 첫 생일이 찾아왔다. 수십 명의 의료진이 모였다. 편지와 선물이 가득했다. 
‘눈을 마주치면 웃어주는 에스더는 환아가 아닌 가족이야’ 
‘출근할 때 문안 인사, 퇴근할 때 작별 인사를 꼭 해야 하는 존재’ 
‘환자복에 뜨개실로 만든 조끼를 입고 할머니 같던 아기천사’ 


저마다의 추억이 눈 앞에 그려졌다. 에스더 역시 돌잡이상에서 많은 물건 중에 가장 익숙한 병원 명찰을 집어 들었다. 웃음이 터진 의료진 한 명 한 명을 나는 눈에 담았다. 수많은 한계에도 살을 맞대고 기꺼이 함께 뛰어넘어 보는 것. 그래서 상처투성이어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가족이라는 걸 배웠다. ‘에스더, 너는 참 많은 가족을 가졌구나. 네가 만난 세상이 비록 재미난 놀이공원은 아니었지만 더없이 따뜻한 곳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엄마가 조금 덜 미안해해도 될까. 아주 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리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자. 그때는 엄마가 네 이야기를 선생님들께 많이 들려드리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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