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가라, 같이 가. 같이 가면 백리 길도 십리 된다.”
요즘 인기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 나오는 대사다. 이 문장이 자꾸 마음에 맴돌다 문득 백리 길 같던 격리 병동 첫 출근 길이 떠올랐다.
2021년, 코로나가 대유행이던 해. 나는 유행성 감염병 대응팀(EIDT)으로 155 격리병동에서의 근무를 시작했다.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문, 복도에 줄지어 놓인 음압캐리어 그리고 긴장감이 감도는 공기 속에서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긴박함은 이곳이 생명의 최전선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Level D 방호복을 입고 전실 문을 처음 통과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가쁜 숨으로 흐려진 고글, 습기로 젖은 마스크, 이중으로 낀 두꺼운 장갑 속의 답답함은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 정신적인 압박으로 다가왔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처음이라 당황한 채 우물쭈물하던 나에게 한 선생님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처음이라 당황했죠? 저도 무서웠어요.” 단순한 한 마디에 나의 두려움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현장을 누비며 모든 것을 척척 해내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은 내게도 그런 순간이 이내 올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첫 걸음을 떼었다.
“같이 가면 백리 길도 십리 된다.”
일이 적응될 때쯤, 거울 앞에서 방호복을 벗다가 손목에 띠처럼 선명한 발진을 발견했다. 라텍스 장갑 위를 테이프로 감싸며 생긴 것이었다. 웨딩 촬영을 앞두고 있던 나는 속상한 마음을 동료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하나 둘 각자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볼과 이마에 움푹 패인 자국, 피부 위로 남은 크고 작은 상처들은 우리가 책임감을 가지고 각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흉터들은 더 이상 가리고 싶은 상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걸어온 자랑스러운 기록이자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변이 바이러스의 연이은 등장은 코로나 시기를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로 만들었다. 장기화되는 상황 속에서 답답함은 무력감이 되었고, 코로나 이전의 세상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를 다시 일으킨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 말 없이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던 동료의 손길, 환자들이 남긴 진심 어린 말과 편지가 나를 부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우리는 서로의 어려움을 공감했고, 그렇게 함께 버텼다.
“같이 가면 백리 길도 십리 된다.”
드라마 주인공 애순의 빈 쌀통을 티 나지 않게 매일 채워주던 주인집 할머니처럼, 힘든 코로나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힘을 보태준 많은 분들 덕분이었다. 확진자 이송 시 빠르고 안전한 동선을 확보해 준 보안관리팀 직원들과 현장에서 함께 땀 흘리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던 미화원분들, 음압시설에 문제가 생길 때면 빠르게 달려와 해결해주던 시설팀 직원들까지. 매일 바뀌는 지침 속에서도 혼란을 줄이기 위해 애쓴 감염관리실과 보호구 착용 후 지친 간호사들이 충분히 휴식할 수 있도록 휴게공간을 만들어주고 도시락을 전달해 주신 총무팀, 그리고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마치 자기 일처럼 반복 설명을 아끼지 않던 병동의 간호사 선생님들, 여러 진료과 선생님들의 세심한 배려까지. 생각해보면 도움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빠르게 질서를 세울 수 있었다. 이 길은 격리병동만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 병원 모든 직원들이 함께 걸어낸 길이었다.
“같이 가면 백리 길도 십리 된다.”
신종 감염병은 계속 생겨나고, 병원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는 문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 나는 그 안에서 매일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새로운 어려움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혜가 있지 않는가? “같이 가면 백리 길도 십리된다” 지금 나의 말이, 행동이,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백리를 십리로 만드는 힘이 된다. 우리는 우리(We) 안에서 매일 배우고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
응급간호팀
정환지 주임
응급간호팀 정환지 간호사는 부인암병동, 응급실, 중환자실을 거쳐 현재는 유행성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감염관리센터 27병동에서 근무 중입니다. 뉴스룸 칼럼을 통해 환자 안전을 위한 의료진의 숨겨진 노고와 이야기를 공유하며 급변하는 의료 환경 속에서 간호사로서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다양한 현장에서 발로 뛰며 발견한 희망과 의미를 생생하게 전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