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칼럼] ISTJ 간호사의 ‘어바웃 타임’ 2025.06.18

 

 

성격유형지표(MBTI) 검사상 ‘ISTJ(현실주의자)’인 나는 늘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중시했다. 간호할 때도 할일 목록(To do list)을 지우는 것에 몰두했다. 환자와의 대화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집중하기 위해 찡그린 눈썹은 내 트레이드 마크였다. ‘새침하지만 일은 잘하는 간호사’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그렇게 나의 시간은 ‘끝내야 할 일’들로만 가득했고, 행복은 퇴근 후에 찾을 수 있는 것이라 믿으며 근무 시간이 그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시간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한 환자를 만났다.

 

백혈병 투병 중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20대 젊은 남자 환자였다. 치료가 쉽지 않은 질환 탓에 그의 분노 조절 장애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에도 침대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고 진정제를 투여한 후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이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체적 치료보다도 정서적인 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용기를 내 먼저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하고 쑥스러워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지만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좋아하는 운동, 음식, 아이돌, 취미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처음엔 경계하던 환자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날카로웠던 첫 인상과 다르게 민수는 여리고 따뜻한 친구였다. 환자를 위해 시작한 대화였지만, 어느새 나도 내 이야기를 꺼내며 위로 받는 날들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민수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몇 주가 흐른 뒤 우리는 제법 가까워졌다. 나를 ‘최강 동안 간호사’라 부르며 아끼던 제로콜라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수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산소를 최대로 높여도 산소포화도가 잘 유지되지 않았다. 절대 안정을 해야 한다는 처방이 내려졌으나 소변줄 삽입을 거부하고 화장실 이동을 고집했다. 고유량 산소가 필요했으나 마스크가 답답하다며 벗어던지길 반복했다. 호흡이 힘들어지자 더욱 안절부절 못했고, 이 모든 게 부모님 탓이라며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 민수를 다독이면서도 밀려 있는 업무에 속이 타들어갔다. 내일도 격앙된 민수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깊은 숨이 나왔다. ‘내일은 꼭 설득해서 치료를 받게 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퇴근했다.

 

그런데 그 내일은 오지 않았다. 민수는 다음 날 하늘나라로 떠났다.

 

내일이 있을 거라 믿었기에 손 한번 더 잡아주지 못했고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 더 건네지 못했다. 

남겨진 건 깊은 슬픔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

 

민수가 남긴 칭찬카드에는 나를 ‘라포를 잘 형성하는 간호사’라고 소개했다. 잘 구부려지지 않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을 모습이 선했다. 더 다정하지 못했던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 둘 떠올라 마음이 아렸다. 나는 편지를 읽으며, 이제는 후회 없이 매일을 살아가는 간호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시간도 환자의 시간도 더 이상 일만으로 채우지 않기로 했다.

 

5월, 내 시간엔 유독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 신발을 신겨드리자 “착해, 예뻐.”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 손길이 참 따뜻했다.
충청도 사투리를 흉내 내는 나를 보고 웃음이 터져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나와 닮았다는 이모티콘을 찾아 보여주며 방긋 웃어 보이던 환자는 그저 사랑스러웠다.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라운딩 시간이 늦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마음속 행복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주 40시간 근무하면 1년에 약 250일, 30년이면 무려 7,800일을 환자와 함께 보내게 된다. 그 소중한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 보내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고단한 일인지 이제는 안다.

 

내가 베푸는 찰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겐 힘겨운 날을 버티게 해주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그들이 나의 지친 하루에 선물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일에만 집중하던 ISTJ 간호사의 시간은 이제 마음을 담아 나누는 순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것은 달라진 나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응급간호팀
정환지 주임

응급간호팀 정환지 간호사는 부인암병동, 응급실, 중환자실을 거쳐 현재는 유행성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감염관리센터 27병동에서 근무 중입니다. 뉴스룸 칼럼을 통해 환자 안전을 위한 의료진의 숨겨진 노고와 이야기를 공유하며 급변하는 의료 환경 속에서 간호사로서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다양한 현장에서 발로 뛰며 발견한 희망과 의미를 생생하게 전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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