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유의어 사전과 AI 번역기를 넘어서 2025.08.13

미국 인기 드라마 '프렌즈'에는 영어 유의어 사전을 잘못 사용해 벌어지는 웃지 못할 장면이 나온다. 아이를 입양하려는 챈들러와 모니카 부부를 위해 친구 조이가 추천서를 써줬는데, 문장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챈들러가 조이에게 의미를 묻는다. 


조이는 원래 문장은 “그들은 따뜻하고 친절하며 마음이 넓은 사람들(They are warm, nice people with big hearts)”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하지만 좀 더 유식하게 보이고 싶어 유의어 사전에서 모든 단어를 바꾼 결과, 추천서에는 이렇게 적히게 된다.

“그들은 습하고 고매하며 거대한 대동맥 펌프를 가진 호모사피엔스들(They are humid, prepossessing Homo sapiens with full-sized aortic pumps).” 이 장면은 내게 큰 웃음을 줬지만, 사실 연구 현장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정확한 단어의 뜻이나 용법을 모른 채 유의어 사전을 사용하면 의미 전달이 크게 왜곡될 수 있다. 이는 연구논문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논문 교정을 하다 보면, ‘evaluate(평가하다)’와 ‘measure(측정하다)’ 같은 단어를 혼용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평가'는 단위가 없는 추상적인 대상을 (ex. 약물의 간독성), '측정'은 단위가 있는 대상 (ex. ALT 수치)에 사용하는 등 용법이 엄연히 다르다. 이런 잘못된 표현이 쌓이면 논문 리뷰어가 연구 자체에 대한 신뢰도를 의심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필자가 대학생 때 미국 가정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식사가 나와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방금 전까지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던 것이 무색하게 그 표현이 영어로 어떻게 되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아 “Wow”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날 처음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 자체가 영어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국어와 영어가 1:1로 완벽하게 대응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에도 억울하다, 귀찮다 같은 감정을 영어로 옮기기 어려워 애를 먹은 적이 많다.


바쁜 일정 속에 영문 논문을 써야 할 때는 번역기의 도움을 받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최근 ChatGPT, Claude, DeepL 등 AI가 탑재된 번역기의 성능이 많이 향상되어 문맥과 감정까지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고, 의학처럼 전문성이 높은 분야에서도 맞춤형 학습을 통해 전문 용어나 복잡한 표현을 자연스럽게 번역해내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영어와 한국어의 구조적 차이 때문에 여전히 어색한 번역이나 의미의 왜곡이 종종 발생한다.

 

특히 관용적 표현에서 억울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번역기들이 ‘환자의 증상이 호전됐다’를 ‘The patient’s symptoms improved’로 번역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에서 ‘improve(향상)’는 환자의 condition, organ function, health, 또는 mood 등에 사용되며, 엄밀히 말하면 symptom에 대해서는 reduce, relieve, diminish, alleviate 등이 더욱 적합하다. 실제로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등 주요 저널에서 ‘symptom was improved’라는 표현은 거의 쓰이지 않다. 대신 ‘symptom was alleviated’와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원어민 의사들조차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symptom improvement’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며 논문 제목에도 종종 등장한다. 다만 비원어민인 우리가 논문을 쓸 때는 이런 표현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리뷰어가 영어 표현이나 문법을 더 깐깐하게 지적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이렇게 억울한 상황을 피하고자 한다면 AI 번역기나 유의어 사전의 제안을 무조건 신뢰하기 보다는 논문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 맞는지 직접 확인해야 한다. 최종 책임은 결국 우리(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임상의학연구소
임준서 박사

임준서 박사는 서울아산병원 임상의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원내 연구진의 논문 작성과 교정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논문 작성과 게재 및 AI 활용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자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발표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최신 기술을 접목해 논문의 질을 높이는 방법과 의료 연구에서 AI의 활용 가능성을 뉴스룸 칼럼을 통해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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