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애빌린으로 저녁 먹으러 갈래요? 2026.01.07

(AI 생성 일러스트)

 

병원에서 환자와 의료진은 모두 치료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치료를 방해하는 순간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해주는 흥미로운 개념이 바로 애빌린 패러독스(Abilene Paradox)입니다. 

 

이는 미국의 한 경영학자가 본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소개한 개념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가족이 함께 쉬고 있던 중 장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80km 떨어진 애빌린에 가서 저녁이나 먹을까?”
“멋진 생각이에요.”
“좋아요!”

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모두 동의했지만, 무더운 날씨에 먼 길을 다녀온 뒤에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아무도 애빌린에 가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려던 마음 때문에 결국 집단 전체가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하게 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애빌린 패러독스입니다.

 

병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자주 일어납니다. 

“통증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회진이나 간호사 라운딩에서 매우 흔하게 들리는 대화입니다.

환자는 의료진이 바빠 보이거나 참으면 나아질 거라 생각해 불편을 숨기며 “괜찮아요.”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의료진은 환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더 물어보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대화를 깊게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적절한 치료 타이밍을 놓치거나 상황이 악화되기도 합니다. 서로를 배려하려던 마음이 오히려 치료 과정의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환자의 ‘진짜 마음’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요? 

 

의료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올바른 의사소통 방법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개방형 질문입니다.
“아파요?” 같은 폐쇄형 질문은 대부분 “괜찮아요”라는 짧은 대답으로 끝나게 됩니다. 반대로, 개방형 질문은 환자가 스스로 상태를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지금 가장 불편한 부분이 있나요?”
“오늘 하루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완전한 개방형이 어렵다면 부분 선택형 질문도 좋습니다.
“쑤시는 통증인가요, 당기는 통증인가요?”
 

“누울 때 숨이 더 찬가요, 걸을 때 더 찬가요?”
이런 질문은 구조화된 대화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도와줍니다.

 

둘째, 관찰 기반 질문입니다. 

의료진이 직접 본 변화나 징후를 바탕으로 묻는 방식입니다.
“팔을 움직이실 때 얼굴을 찡그리시던데, 어디 불편하신가요?”
“호흡이 빨라지신 것 같은데 지금 숨쉬기 어떠세요?”
환자가 놓친 증상이나 말하지 못한 불편함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도록 돕습니다.

 

셋째, 구체화·수치화 질문입니다. 

막연하게 묻기보다 상황을 구체적인 맥락으로 좁혀가는 방식입니다.
“걷는 건 괜찮으신데, 앉았다 일어날 때는 어떠세요?”
“통증을 0에서 10까지 점수로 표현한다면 몇 점 정도일까요?”
이런 질문은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점검하게 하고, 의료진에게는 치료 판단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사실 이 세 가지 의사소통 방법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배우고, 사용해왔던 것들입니다. 다만 바쁘게 돌아가는 진료 현장에서 잠시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 장면을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무더운 어느 날, 아무도 가고 싶지 않았던 애빌린으로 온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떠났던 그 순간을.

응급간호팀
정환지 주임

응급간호팀 정환지 간호사는 부인암병동, 응급실, 중환자실을 거쳐 현재는 유행성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감염관리센터 27병동에서 근무 중입니다. 뉴스룸 칼럼을 통해 환자 안전을 위한 의료진의 숨겨진 노고와 이야기를 공유하며 급변하는 의료 환경 속에서 간호사로서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다양한 현장에서 발로 뛰며 발견한 희망과 의미를 생생하게 전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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