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나의 '별'에게 전하는 인사 2026.04.08

-2022년 국제진료센터에서-

 


(AI 활용 일러스트)

 

“메시지 왔어요.”

 

새벽녘을 가르는 알람이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늘 골수 이식을 받고 무균실에 입실할 예정이던 베트남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는 연락이었다. 불길한 예감과 함께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환자가 입원해 있던 병동에서 심폐소생술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 18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병동에 들어선 순간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에 압도당할 것만 같았다.

 

그는 바다를 건너온 환자였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은 이제 바다 너머에도 존재했고, 우리 병원 국제진료센터를 통해 입원한 수많은 외국인 환자들처럼 그 역시도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이곳에 도착했다.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각자의 절박한 사연을 안고서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단순한 진료 연계가 아니었다. 현지 병원의 방대한 의무기록을 검토하고 정리해 가장 적합한 의료진과 연결하고, 치료의 전과정에서 환자와 의료진 사이를 오가며 소통을 이어가는 일이었다. 때로는 설명자였고, 때로는 설득자였으며, 때로는 보호자에 가까운 존재였다.

 

낯선 환경 속에서 환자들은 종종 두려움과 오해에 갇히기도 했다.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는 작은 균열을 만들었고, 그것이 불신으로 번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매일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미처 말하지 못한 불편을 읽어내며, 동료 의료진과의 연결고리가 되기도 했다.

 

의무기록 너머 실제로 마주한 베트남 환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위중했다. 골수 이식이라는 적극적 치료까지 넘어야 할 과정이 많았다. 그 지난한 시간을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모두 포기하지 않고 버텨냈고, 마침내 그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순간—예측할 수 없었던 출혈로 환자는 마지막 희망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를 기다리던 무균실은 결국 다른 생명의 몫이 되었고 그는 우리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되었다.

 

‘마지막 사투’ 그 분주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깊은 정적만 남았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얼어붙은 보호자의 눈빛 너머로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저 곁에 서 있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감정에 흔들릴 새도 없이 환자를 고국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대사관과 협력해 보호자의 출국과 시신 운송에 필요한 서류를 국문과 영문으로 작성하고, 검역 절차 등 시신 운송을 위한 모든 과정이 빠르게 이어졌다. 환자는 더 이상 일반적인 방식으로 귀국할 수 없었기에 시신 방부 처리가 가능한 기관을 수소문하며 운송 준비를 서둘렀다. 하나라도 놓치면 안되는 일들이었다. 다행히 출국 일정을 하루 앞당길 수 있었다.

 

 

“깜언… 깜언…”

보호자는 이동하는 내내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이 오히려 마음 속을 파고 들었다.

 

 

“방부처리 후에 시신 운송 잘 진행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운송’이라는 말이 그가 더 이상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차갑게 일깨웠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너머는 신의 영역이라고 스스로를, 또 서로를 다독였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 더 빨리 입국했다면….’

‘한 번 더 찾아가 설명했다면…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만약’과 ‘혹시’를 떠올리며 마음은 점점 가난해졌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는데… 이럴 때면 정말 신이 있는지 의문이 들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의료인은 늘 생(生)의 가능성과 싸운다. 수많은 위험을 줄이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견디며 환자와 함께 가장 치열한 시간을 건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끝내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환자를 잃는다는 것은 반짝이던 별이 한순간 사라지는 일과 같았다.

정적과 암흑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허탈함과 두려움, 슬픔과 죄책감이 뒤섞인 채 멈춰 서게 되는 순간.

그날, 그가 생을 놓친 그 시간, 타지에서 급히 이송된 미국인 산모와 태아가 한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환자들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 어딘가에서 편히 빛나고 있을 그 별을 떠올리며—

“미안해요. 이제는, 아프지 말아요.”

아카데미운영팀
홍민지 차장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과 감염관리실, 국제진료센터를 거쳐 현재 아카데미운영팀에서 전 직원의 성장을 돕는 교육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5년, 간호사로 살아온 시간 동안 의료현장에서 마주한 수많은 장면들 속에 스며든 의료인으로서의 고민과 생각을 '진심'의 온도로 잔잔히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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