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나에게 쓰는 편지 2026.05.20

 

 

(AI 활용 일러스트)

 

가정과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병원을 떠난 시간이 어느새 1년이 되었다. 언제나 내 자신보다 환자를 먼저 살피는 데 익숙했던 나였기에, 휴직을 결심하고 마지막 근무를 마치던 순간까지도 마음 한 켠에는 환자의 내일과 모레 상태가 어떨지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다음 날에도 병원에 계속 출근해야 할 것만 같은 묘한 무게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난 1년간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하고 감사했다. 아기의 탄생부터 성장의 모든 과정을 함께하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초음파 사진 속 콩알만 했던 태아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신생아가 첫 돌과 두 돌을 지나며 몸도 자라고 인격도 형성해 간다. 이제는 내 말을 알아듣고 소통하는 존재가 되었다. 애교도 부리고, 떼도 쓰고, 화도 내고, 슬퍼하기도 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저절로 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누군가의 보살핌과 관심 속에 자란다. 아이를 직접 키워보니 아이도, 나도, 그리고 타인도 모두가 소중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내가 만나는 환자분들 역시 더욱 존중하며, 그만큼 책임감 있게 대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휴직 기간 동안 한편으로는 내가 사회적으로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허전함과 공허함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깊이 고민하고 동료들과 소통하며 많은 업무를 해결해내던 내가, 가정에서는 아직도 내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휴직은 내 삶에서 직장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가정을 돌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직업인으로서, 간호사로서의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 터닝포인트이기도 했다.

 

나에게 ‘직업’이란 무엇이었을까. 사실 처음에 간호사라는 일을 지금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입으로는 선한 일을 하고 환자 곁을 지키는 나이팅게일의 고귀한 사명을 이야기했지만, 병원이라는 환경 속에서 많은 업무와 제한된 시간에 치이며 소진된 마음은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듯 때때로 회피로 향하곤 했다. 때로는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초심’을 지켜라, 되찾으라 말하지만, 나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었라 생각했다. 어쩌면 내 초심은 애초부터 완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내가 생각하는 직업관은 조금씩 성숙해졌다고 느낀다. 비록 보잘것없는 초심이었다 해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 입사할 때 자기소개서에 썼던 말이 있다. ‘뚜벅뚜벅’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고. 단순히 걷는 모습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당당하게 나아가는 모습이 좋았다.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묵묵히 걷다 보면 결국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완벽한 간호사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나 역시 그런 포부를 품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리고 시간이 쌓일수록 간호의 의미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된다. 

 

누군가 방송에서 "나는 급행열차를 탄 것처럼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그랬다. 뒤돌아볼 틈도, 숨 고를 새 없이 앞으로만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니 굽이굽이 이어진 기찻길 위에 내가 지나온 흔적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 나는 수많은 과정을 겪으며 조금씩 달라져 지금의 ‘나’가 되었구나. 

 

이번 칼럼은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신해철 씨의 솔로 2집 ‘Myself’에 수록된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노래에서 제목을 빌렸다.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 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중략)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또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마음은 늘 복잡하고 두렵다. 누구나 그렇다. 두렵고 무섭지만 또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사는 것’ 아닐까. 이 글 자체가 어쩌면 나에게 쓰는 편지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모든 간호사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암병원간호1팀
김치호 대리

병동에서 마주한 특별한 순간들, 더 나은 의료 환경을 위한 따뜻한 시선을 담은 간호 에세이를 전합니다. 현재는 서울아산병원 암병원 간호간병통합서비스 병동에서 환자들의 치료와 회복을 돕고 있습니다. 보호자 없이 환자들이 최상의 간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이곳에서 환자들과의 병원 생활을 되돌아보며 '이상적인 병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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