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 박사를 취득하고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며 의과학자의 꿈을 키워가던 중에 번아웃이 찾아왔다. 잠시 숨을 고르던 차에 서울아산병원 논문 교정 업무에 지원하면서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됐다. 어려서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닦은 언어 감각과 연구자로서 쌓은 기초 과학 지식, 의학적 배경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는 업무였다.
“연구실에서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 잘했다는 칭찬은 들었어도 고맙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논문을 교정해서 보내면 연구자들로부터 연구의 내용과 중요성을 잘 표현해 줘 고맙다는 메세지가 속속 도착했습니다. 훨씬 더 큰 보람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우연히 만나 제 인생의 방향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10여 년에 걸쳐 1,200여 편의 논문을 교정하며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이제는 연구 논문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전략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2016년 가을, 메이요 클리닉과 MD앤더슨 암센터 등 미국의 유수 병원을 둘러본 병원 경영진은 영어논문교정지원부 시스템을 도입했다. 국내 대학병원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선제적인 시스템이었다. 이듬해 합류한 임준서 특수전문학자는 논문 교정뿐 아니라 논문 컨설팅과 교육으로 업무를 확장하며 서울아산병원의 연구가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저널에 실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현재는 신경과학 석사이자 수준급의 한국어 실력을 갖춘 다니엘리 사원과 업무를 함께 하고 있다.
처음 논문을 쓰는 전공의의 상담부터 커버 레터를 다듬어 달라는 요청, 심사자의 코멘트 내용과 그에 대한 대답을 상의하는 등의 다양한 의뢰가 매일 전달된다. AI 시대가 당도하며 문법적인 오류는 많이 줄었지만 적확한 표현을 구사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대부분의 의학 저널에선 교정 확인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저널 특색에 맞게 커버 레터를 매력적으로 다듬고, 까다로운 심사평에 대응할 논리를 짜는 1:1 심화 상담은 영어논문교정지원부만의 특장점으로 꼽힌다. 개인 시간을 쪼개 환자를 위한 연구에 매진하는 연구자들의 마음을 알기에, 그 결과물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강력한 엔진을 준비하고 있다.
“수많은 논문 투고를 도우면서 각 저널의 편집장과 동료 심사자의 마음을 읽는 제 나름의 안목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병원 논문의 강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스윗 스팟(sweet spot)’을 찾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매일 1~2건의 영문 교정 신청이 들어온다. 늘상 10여 편의 논문이 그의 손질을 기다리고 있다. 연구자를 돕고 싶은 마음과 새로운 질병을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지적 자극, 그리고 마감 기한이라는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논문 작업마다 애정이 담긴다. 어떤 논문은 연고를 바르고 밴드만 붙여주면 되지만 어떤 논문은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큰 수술이 필요하기도 하다.
“업무 초기에는 연구 주제와 결론만 보고도 감탄하기 바빴어요. 조력자보다는 응원단의 시각이었죠. 연구자 입장에서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만 골몰하면서요.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평가자 입장에서 보다 냉정한 코멘트가 필요했죠. 한편으로 연구자들의 반발이 있진 않을까, 당신 때문에 심사에서 떨어졌다는 원망을 사진 않을까 조금 긴장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연구자는 없었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며 한 팀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임영석 교수와 최원묵 조교수가 기존 학설에 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연구를 들고 찾아왔다. 생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고, 받아들여진다면 환자들의 간암 발생률을 줄일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기존 연구자와 동료 심사자들은 반감을 보였다. 여러 번의 재투고를 거쳐 논문 내용이 오해없이 전달되도록 다듬었다. 결국 논문은 JCI 저널에 게재되었고 성공적인 결과에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저와 논문 작업을 했던 분들이 다른 병원에 가서도 종종 연락하세요. 제 역할이 그립다면서요. 스스로의 동기와 열정이 가득한 분들과 함께하면 시너지가 상당합니다. 요즘 해외 학회에 나가 AMC에서 왔다고 하면 세계적 저널의 편집장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세계 3대 의학 저널 중 하나인 「자마(JAMA)」 에디터들은 우리 병원을 방문하기도 했죠. 체계적인 논문 지원 시스템을 소개하며 우리 연구 수준을 각인시킬 때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컨설팅을 할 때마다 공통적인 질문을 받곤 한다. 그 내용을 모아 매년 SPARK 세미나를 열면 의사, 간호사, 대학원생, 사무직 직원까지 많은 이들이 모인다. 빠르게 등록이 마감될 때가 많아 진료과 별로 강의를 요청하기도 한다. 6월부터는 신경외과에서 6주 과정의 강의를 진행한다. 울산의대 대학원 강의와 원내·외 AI를 이용한 논문 작성 강의 등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사실 AI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했어요. 단순 교정은 AI가 대체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중요한 전략적 컨설팅은 AI가 채워줄 수 없더라고요. 커버 레터만 해도 너무 짧게 설명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길게 쓰면 흥미를 끌지 못해 안 읽힐 수 있거든요. 그런 간극을 좁히는 데서 전략가 역할을 찾아나갔습니다.
AI 관련 강의에선 AI에 의존하기 전에 스스로 고수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좋은 연구와 논문의 본질은 연구자가 철저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예요. 연구자들의 노력이 빛을 보는 데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