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발가락이 간지러워요" 2026.08.26

 

 

(AI 생성 일러스트)

 

 

트라우마(Trauma)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지만 이 말이 가진 무게는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외상 환자가 들어오는 순간에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속수무책으로 젖은 어느 날처럼 외상은 한 사람의 일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그해 여름, 한 남자의 시간도 그렇게 멈추었다.
운동경기 중 교통사고로 실려 온 그는 온전한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처참한 상태였다. 거대한 트럭이 그의 몸을 덮쳤다고 했다. 사고 현장은 얼마나 참혹했을까. 비명과 정적이 뒤엉킨 그 순간, 그는 기적처럼 목숨을 건져 중환자실에 도착했다.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을 살폈다. 의식 없는 몸은 말이 없으니, 상처가 대신 이야기해 주어야 했다. 내부 장기 손상으로 복부는 단단하게 부어 올랐고, 골반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몸을 아주 조금만 돌려도 부서진 뼈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장기 치료의 여정을 알리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수없이 많은 밤과 낮이 바뀌는 동안 환자는 몇 번의 수술과 위급 상황을 거쳐 다행히 의식을 되찾고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간호사님…”
“네, ooo님.”
“발가락이… 너무 간지러워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환자의 의식 속에는 아직 발가락이 남아 있었고 내 눈에는 없었다. 사고 당일 환자의 기억이 멈춰 선 그때, 종아리 밑은 으스러졌고 목숨을 건지려면 어쩔 수 없이 다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보호자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환자가 안정될 때까지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그 시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을까. 환자를 위한 것인지, 가족을 위한 것인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큰 사고를 겪으면 신경이 예민해져 여러 감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심호흡을 한번 해볼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도 그는 발목이 시리다거나 발가락이 간지럽다고 호소했다.
나는 절단 부위 위로 린넨을 조심스레 덮었다. 상처를 덮는 것인지, 절망을 덮는 것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다시 만난 그는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울었고, 거짓말 같은 현실에 몇 번이나 이불을 들춰 보았다고 했다.
교대하는 간호사들을 걱정해 주고,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돌보느라 고생이 많다며 먼저 웃어 주던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환자의 시간은 다시 멈췄고 침묵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가끔 울리는 알람음이 요동치는 환자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했다.


한 사람의 시간은 멈춰도 중환자실의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는 병동으로 향했고, 누군가는 끝내 가족의 손을 놓고 눈물의 강가를 건넜다.

 

분주한 의료진의 발걸음, 쉼 없이 울리는 모니터 알람, 애써 삼키려 해도 새어 나오는 가족들의 울음소리.
그 모든 시간을 그는 침대 위에서 소리로, 또 공기로 함께했다. 어쩌면 그 장면 속에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간절한 오늘을 끝내 맞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식사를 하기 시작한 그는 남겨진 허벅지를 조심스레 움직이며 물었다.
“부기가… 많이 빠졌나요?”
그는 한동안 허벅지를 천천히 매만졌다. 그리고 더 이상 이불을 들추지 않았다.


급성기 치료가 끝나고 환자가 병동으로 전동하던 날, 기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다리 절단으로 생긴 수많은 부재(不在)에 익숙해져야 할 환자의 고단한 일상을 생각하며, 나는 한참 그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그의 곁에 섰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손 하나뿐이었다.
그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같이 있어줘서…”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몸은 가벼워졌는데… 마음은 더 무거워졌네요.”
그리고 어렵게 한마디를 꺼냈다.
“다시… 운…”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중환자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멀어져 가는 환자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환자의 오늘이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중환자실에는 오래된 금기 하나가 있다. 환자를 궁금해하면 그 환자의 상태가 나빠져 다시 중환자실 온다는 이야기다. 믿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그 금기를 깨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오는 날이면 문득 그 환자가 떠오른다.
지금도 가끔 발가락이 간지러울까?
그리고 그때보다는 덜 무거운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

서울아산병원 신관 대나무숲

아카데미운영팀
홍민지 차장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과 감염관리실, 국제진료센터를 거쳐 현재 아카데미운영팀에서 전 직원의 성장을 돕는 교육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5년, 간호사로 살아온 시간 동안 의료현장에서 마주한 수많은 장면들 속에 스며든 의료인으로서의 고민과 생각을 '진심'의 온도로 잔잔히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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