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같은 데이터, 다른 논문 2026.09.03

 

(AI 활용 일러스트)

 

생성형 AI는 성능 좋은 자율주행자동차와 비슷하다. 길을 달리고, 장애물을 피하고, 속도를 조절하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놀라울 만큼 잘 수행한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지 않으면 이 자동차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논문 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AI는 문장을 다듬고, 문단 사이를 연결하고, 필요한 세부 내용을 채워 넣는 데 능하다. 그러나 이 논문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무엇을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삼아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은 연구자의 몫이다.

 

논문의 목적지가 특정 저널이면 방향성은 제목과 서론에서 드러난다. 같은 연구 결과라도 무엇을 연구의 중심에 놓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논문으로 변한다. 다음과 같은 연구를 진행했다고 가정해 보자.

 

제2형 당뇨병 환자 코호트에서 위고비(GLP-1 수용체 작용제 [GLP-1RA]) 사용군의 치매 발생률이 낮음을 확인하였으며 일부 환자의 뇌영상과 염증 지표에서도 신경퇴행 감소를 시사하는 소견을 발견하였다. 이에 맞추어 알츠하이머병 생쥐 모델에서는 GLP-1RA가 미세아교세포 활성화와 신경염증을 줄이고 인지기능을 개선함을 확인하였다.

 

이 연구를 어떤 분야에 투고하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논문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이 결정되며,  그에 따라 서론과 제목이 달라지게 된다.

 

 

어느 분야로 투고할지 정하는 것부터 생각보다 복잡할 수 있다. 우리 연구 결과의 어떤 면을 앞세울지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새로운(novel) 결과를 내세울 것인가, 아니면 가장 견고한(solid) 결과를 내세울 것인가? 만약 GLP-1RA와 치매의 연관성 자체가 이미 몇몇 코호트에서 보고된 바 있지만, 사람과 동물 데이터를 함께 제시하며 기전까지 보여준 연구가 드물다면 우리 연구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새로움(novelty)이 되는 것이다. 반면 코호트 규모가 크고 추적 기간이 길어 통계적으로 매우 견고하다면 그 임상적 견고함 자체를 앞세우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무엇을 앞세우느냐에 따라 관심을 가질 저널도, 커버레터의 첫 문장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여기에 연구 디자인에서 나오는 근거 수준(evidence level)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후향적 코호트인지, 전향적 코호트인지, 무작위 임상시험 데이터의 이차 분석인지 등에 따라 같은 결과라도 실릴 수 있는 저널의 급이 달라진다. 생쥐 모델에서 얼마나 다각도로 기전을 검증했는지도 고려 대상이다. 아무리 흥미로운 가설이라도 근거 수준이 낮다면 최상위 저널보다는 그 근거 수준에 맞는 저널을 찾는 편이 현실적이다. 반대로 근거 수준은 충분한데 상대적으로 약한 독창성(novelty)을 지나치게 드러내면 편집장이 이를 알아보고 바로 심사를 거부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는 AI가 생각만큼 큰 도움을 주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AI는 저널 홈페이지에 적힌 aims and scope를 요약하고 후보 저널을 여러 개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저널이 최근 어떤 연구를 좋아하는지, 어느 정도 규모와 연구 디자인을 기대하는지, 비슷한 주제라도 어떤 각도의 논문을 선택하는지는 홈페이지의 소개글 몇 문장 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결국 연구자는 평소 자신이 목표로 하는 저널의 논문을 주기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 저널의 논문들은 어떤 제목 형태를 갖는지, 서론이 보통 어떤 질문에서 시작하는지, 어떤 연구 디자인이 실리는지 등을 보면서 저널 편집국이 무엇을 새롭고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체득해야 한다. 그런 경험이 쌓여야 자신의 연구가 어디에 어울리는지 판단할 수 있으며, 나아가 특정 저널을 염두에 두고 연구 방향을 설계할 수도 있게 된다.

 

제목과 서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커버레터는 결국 논문의 얼굴이다. 심사자도, 편집인도, 연구자도 세 가지를 먼저 보고 이 논문을 계속 읽을지 판단한다. 그런데 이 얼굴을 잘 그리려면 좋은 붓을 고르는 것보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AI라는 붓은 정교하고 빠르지만, 캔버스에 무엇을 담을지는 여전히 화가의 몫이다.

 

좋은 목적지를 정하는 능력은 좋은 문장을 쓰는 능력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이 능력은 평소에 내가 목표로 하는 저널들을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비판적으로 읽어 왔는가에서 자란다.

 

 

임상의학연구소
임준서 박사

서울아산병원 임상의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원내 연구진의 논문 작성과 교정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논문 작성과 게재 및 AI 활용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자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발표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번 뉴스룸 칼럼을 통해 최신 기술을 접목해 논문의 질을 높이는 방법과 의료 연구에서 AI의 활용 가능성 등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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