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아산병원에 첫발을 내디딘 후 나의 전문성이 한 단계씩 성장하는 것에 깊은 자부심을 느끼며 종양내과 간호사로 성장했다. 때로는 식사를 거르고 몸이 지치던 날도 있었지만,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건 나의 작은 손길로 조금씩 회복하는 환자들을 바라보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암치료를 위해 입·퇴원을 반복하던 환자와는 어느새 안부를 묻고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때로는 수줍게 간식을 건네며 고마움을 표현해 주시던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병원에 오시고 일상에서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달리, 환자는 점점 더 쇠약한 모습으로 반복해서 입원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마지막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날들이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무력감이 찾아왔다. 간호사가 되기 전까지 죽음을 경험해 본 적 없던 나로서는 이 먹먹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환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환자의 병세가 나빠지는 게 나의 탓은 아닌지 마음을 졸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전문가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복잡한 마음을 꽁꽁 싸매어 가슴 속 깊숙한 어딘가에 묻어둔 채 업무를 이어갔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시간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선배 간호사가 된 지금 후배 간호사를 보며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보호자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임종한 환자의 몸에서 마지막 주삿바늘을 제거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리며 조용히 병실을 정리하는 일이 우리가 건넬 수 있는 마지막 간호이자 작별인사다. 언젠가 한 후배 간호사가 그 순간의 슬픔을 묻어두었다가 퇴근길에 혼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말기 암환자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그리고 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간호사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이어졌다. 내가 찾은 답은 ‘죽음을 바라보는 간호사의 태도’가 환자의 존엄한 죽음과 간호사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꽁꽁 숨겨왔던 힘듦과 슬픔을 꺼내어 이야기하고, 혼자만의 고민이 아닌 모두의 고민이었음을 나누며, 죽음을 단지 끝이 아닌 삶의 완성으로 건강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도 회복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모아 2025년 생애 말기 암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을 위한 치유의 모임 ‘온담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온담회’는 ‘따뜻한 이야기를 담는 모임’으로 암병원간호1, 2팀 간호사들이 주기적으로 모여 생애 말기 환자들과의 경험을 나누며 서로를 다독이고 회복의 힘을 얻는 자리이다. 임종 간호 경험과 생각 나누기, 해외병원의 임종 간호 사례, 임종실의 핵심가치 공유, 환자의 욕창 간호 경험, 좋은 죽음을 위한 의료진의 역할 등 깊이 있고 따뜻한 주제를 다뤘다. 쉽게 꺼내지 못했던 저마다의 슬픔을 조심스럽게 나누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총 6번의 모임 동안 260명의 간호사가 참석했고, 만족도는 5점 만점에 4.8점으로 높은 호응을 얻었다.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 처음 겪는 힘든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간호사라서 감사합니다.”
“바쁘더라도 환자와 보호자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분들이 원하는 방향을 지지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간호사들이 남겨준 후기 속에서 온담회가 피워낸 작은 변화들이 보였다. 모임을 통해 간호사들이 힘듦과 슬픔에 머물지 않고, 환자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간호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가고 있다.
돌아보면 우리의 기억 속엔 슬픔만큼이나 빛나는 순간들도 가득하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기 암환자를 위해 병동 간호사들이 마음을 모아 기적 같은 퇴원을 도왔던 경험, 부모님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을 소중한 사진으로 남겨드렸던 일, 쏟아지는 업무를 잠시 미뤄둔 채 환자의 삶의 여정을 묵묵히 들으며 따뜻한 손을 잡아주었던 그날의 기억들이 지치고 닳아 가던 우리를 한층 더 빛나게 만들고 있다.

얼마 전 임종을 준비하던 환자가 있었다. 폐암을 진단받고 뼈로 전이가 된 상황이라 작은 움직임에도 극심한 통증과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주치의는 남은 시간이 길어야 일주일 정도일 것이라고 조심스레 전했고, 스무 살 남짓한 아들이 아버지 곁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치료실, 기계 소리와 분주한 발걸음만이 끊이지 않는 그 공간에서 환자는 고통을 참으며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환자가 꺼낸 첫마디는 “저는 언제 죽나요? 이 고통을 언제 끝낼 수 있나요?”였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돌봄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병동 간호사들은 환자를 창밖의 햇살을 볼 수 있는 독립된 공간으로 옮기고 가족, 친지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면회를 도왔다. 진통제를 조절해 통증을 덜어드리고, 원내 목사님을 연결하여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렇게 환자는 조금은 평안한 얼굴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고, 늘 표정 없이 무뚝뚝하던 아들이 조용히 고마움을 전했다.
어쩌면 간호사로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순간들이 우리를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빚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따뜻한 온기로 병실을 채워나가는 나의 동료와 후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혼자 울지 않아도 되는 곳, 우리의 이야기가 따뜻한 위로가 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의 손을 잡고 환자의 마지막을 포근하게 밝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