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아산인 이야기 안갯속 길을 더듬어 걸으며 2021.07.15

신경과 임재성 교수

 

 

”뇌가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속뜻을 직감한 환자는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지만 치매 증상을 늦추거나 완화하는 치료는 가능합니다.” “어차피 낫지도 않을 걸 뭐….” 환자는 이미 체념한 듯했다. “어르신, 병원에 빨리 잘 오신 겁니다. 나중에 집이 불에 타서 남은 게 없을 때 손을 쓰면 아무 소용 없어요. 초기에 불부터 딱 잡고 고쳐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환자의 눈높이에서 초기 관리의 필요성을 설득하며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임재성 교수는 환자와의 긴 동행을 시작했다.

 

집요하게 찾은 답

전공을 정하던 시기, 앞에 나서기보다 혼자서 진득하게 답을 찾아가는 성격은 신경과와 잘 맞을 듯했다. 낮에는 신경과 환자를 만나고 밤이 되면 실험실에서 뇌전증 발작 동물 실험을 진행했다. 사람과 비슷한 발작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밤새워 지켜봐야 했다. 동물 실험이지만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문득 대학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칼 융의 분석심리학 수업이 떠올랐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인지 기능에 대한 연구자료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이면을 추적하는 과정에 흥미가 더해졌다. 신경망 분석을 위해 코딩과 영상 분석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기초와 응용과학의 최전선 중의 하나인 치매 분야에 다다랐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환자를 만난 적이 있다. 자식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왔지만 자신의 치매 증상을 인정하지 못하고 젊은 의사의 조언을 듣는 것조차 못마땅해했다. 군인 아버지를 둔 임 교수는 환자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환자 스스로 치료받겠다는 마음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환자의 소소한 인생 이야기까지 귀 기울이며 증상과의 관련성을 차근히 설명했다. 환자가 먼저 다음 진료를 약속했다. “치매는 완치가 불가능하고 치료할 무기가 제한적입니다. 환자들은 여러 병원에서 똑같은 진단과 관리 방법을 듣습니다. 관건은 환자와 보호자가 그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달하느냐입니다. 그래서 환자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합니다. 외래 진료가 오래 걸리는 이유이자 제 일에 애착을 갖게 하는 요소죠.”  

 

병원 밖에서 만난 치매

정부가 주관하는 치매안심센터에서 10여 년간 파견 진료를 맡았다. 외출이 어려운 환자들은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병원에선 만나본 적 없던 환자들이었다. “‘약이랑 음식 잘 챙겨 드세요, 운동 꼭 하세요’와 같은 지침이 환자들에게 얼마나 추상적인지 알게 됐어요. 덥고, 춥고, 퀴퀴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데 급급한 어르신들에겐 무의미한 이야기죠. 치매 환자들이 사회 시스템 안으로 들어올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정책 반영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관련 학회 활동을 시작했다. 또 문화생활이라고는 엄두도 못 내는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과 오랫동안 협력사업을 진행해 왔다. 지역사회의 자원을 속속들이 파악하면서 병원을 찾은 환자들에게도 적절한 보조 수단을 제안할 수 있었다. “제가 꿈꾸는 시스템은 지역사회 곳곳에 치매 환자들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환자의 상태를 고려해 운동 처방을 내면 지역 체육관에서 전문 트레이너나 치료사가 치료 수행을 돕는 거예요. 음식 처방도 마찬가지고요. 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이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듯이 치매 환자를 위한 시스템도 구축되었으면 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오늘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사 출신의 젊은 환자가 조발성 치매로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었다. 한두 해 전만 해도 대화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임 교수도 알아보지 못했다. 배우자를 놓치면 금세 길을 잃었다. “무슨 병인지 아는데도 치료할 수 없을 때 가장 낙담이 되죠. 그럴 때마다 멀리서 찾아와 한참 어린 저를 깍듯이 대하며 열심히 치료에 따라오는 환자분들에게서 위안과 격려를 받습니다. 진료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환자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마음속 응어리는 없는지 더 듣고 싶어요. 따뜻한 한마디라도 들려드리고 싶고요. 우리의 대화 속에 치료의 실마리와 연구와의 접점도 있을 겁니다.”

 

임 교수는 혈관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뇌 병변을 분석해 뇌 기능을 이해하고 교정 가능한 인자를 찾는 작업 중이다. “지금은 안갯속을 걷는 것 같지만 시간이 쌓이면 조금씩 연결되어 전체적인 그림이 나올 겁니다. 다행인 건 치매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약들이 시도되고 있고 일부는 올해 FDA 승인도 받았습니다. 머지않아 치매가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바뀔 겁니다. 그때까지 제 하루하루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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