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전문가 칼럼 기관 발생과 예정된 세포사멸 2021.11.08

의생명과학교실 최순철 교수

 

사람의 손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구성돼 있지만 임신 초기 태아의 손은 벙어리장갑을 낀 것처럼 주걱모양을 하고 있다. 개구리 유생 시기에 올챙이는 긴 꼬리를 가지나 성체로 변태하는 과정에서 꼬리가 사라진다. 사람의 심장은 두 개의 심방과 두 개의 심실로 구성되고 성인 남성은 여성과 다르게 자궁, 난관으로 발달하는 뮬러관이라 불리는 생식 조직을 갖고 있지 않다. 여기 열거된 이 평범한 사실들은 무관해 보이지만 이면에는 한 가지 공통된 세포 현상을 수반한다. 그것은 예정된 운명대로 세포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예정된 세포사멸(programmed cell death)이라고 한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은 수정란이라는 한 개의 세포로 삶을 시작하여 발달 과정을 통해 복잡하고 완전한 형태의 개체가 된다. 이를 위해 세포들이 분열하여 번식하고 각자 특이한 종류의 세포로 분화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직관과는 다르게 초기 발생 시기와 성체 조직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세포가 새로 생기는 것만큼 세포들이 죽으며, 그것도 매우 정교하게 통제된 방식으로 일어난다. 주걱 모양을 가진 태아의 손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있는 세포들이 사멸하여 없어짐으로써 온전한 모양을 갖게 된다. 올챙이의 꼬리는 성체가 되어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세포사멸을 통해 없어지고, 남성에서는 자궁, 난관과 같은 기관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관련 생식 조직은 성장 과정에서 사라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기 전 태아가 갖고 있던 난모 세포의 80%는 세포사멸을 통해 도태하고 초기 발생 중 생성된 신경세포의 절반도 사멸한다. 면역계에서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위험한 면역세포는 사멸을 통해 제거된다. 즉 세포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 온전한 형태와 균형 잡힌 세포의 수를 가진 완전한 개체로 태어나고 위험한 환경으로부터도 보호받게 된다는 이 신비로운 사실을 엿볼 수 있다.

 

2002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영예는 ‘기관 형성과 세포의 죽음에 관여하는 핵심 유전자’를 규명한 공로로 미국 버클리 분자과학연구소의 시드니 브레너,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존 설스턴, 미국 MIT의 로버트 호비츠 3명에게 돌아갔다. 1960년대 분자생물학 연구의 첨단에 있던 브레너는 동물의 행동이 유전적으로 어떻게 조절되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모델 동물을 발굴하여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박테리아를 먹고 사는 다세포동물로서 3.5일 만에 알에서 성체로 성장하고 완전히 자랐을 때 그 크기가 1mm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이 작은 기생충은 중요한 생명현상을 규명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1960년대 말 브레너 연구단에 합류한 설스턴은 수년에 걸친 현미경 관찰로 이 동물을 구성하는 959개 세포들의 계보를 완벽하게 그리는 데 성공했다. “이 작업은 어렵고 고된 일이었지만 매우 가치 있고 매력적인 것이었다”라고 그가 말한 바 있다. 결국 이 힘겨운 일의 대가로 발생과정에서 일어나는 예정된 세포사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선충의 유생 시기에는 1,090개의 세포가 생성되지만 성체로 발생하는 과정에서 정확히 131개의 세포가 사멸한다. 설스턴과 함께 세포 계보 작성에 기여했던 호비츠는 1980년대 후속 연구를 통해 ced-3, ced-4, ced-9와 같은 새로운 유전자를 발굴하여 세포사멸을 조절하는 분자 네트워크를 규명했다. 놀라운 점은 이 작은 기생충에서 발견된 세포사멸 기전과 동일한 조절 방식이 사람에서도 발견됐던 것이다.

 

호비츠는 세포사멸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가장 큰 전율을 느꼈던 순간은 ced-9 유전자가 암 발생과 관련된 Bcl-2라는 사람 유전자와 같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라고 말한다. 한낱 작은 생물체에서 발견된 다분히 추상적인 분자 기전이 인간 생물학, 나아가 인간 질병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분되는 요소였던 것이다. 정교하게 통제된 세포사멸이 완전한 생명체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것만큼 그 조절을 실패하면 치명적인 질병이 유발되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암과 자가면역 질환은 정상적으로 일어나야 할 세포사멸이 지나치게 억제됨으로써 야기되는 결과이고 세포사멸이 과도하게 일어나면 뇌졸중, 알츠하이머병, 에이즈와 같은 난치병이 초래된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지금의 많은 연구자들은 세포사멸을 방해할 수 있는 물질을 발굴하여 퇴행성 신경계질환 등을 치료하고자 한다. 반대로 세포사멸을 촉진하는 전략을 통해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2002년 노벨상 수상은 브레너에게 다소 늦었다는 평가가 많다. DNA 이중나선 구조가 규명된 이후 브레너는 트리플렛 코드 가설을 통해 DNA 유전정보가 단백질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한 분자생물학 초기 연구의 핵심적인 선구자다. 설스턴은 국제컨소시엄으로 추진됐던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영국측 책임자로 이 사업이 완료됐을 때 인간유전체 정보가 특정 기업 혹은 국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동의 자산이 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이 또한 노벨상 수상자에 걸맞은 행적으로 보이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시드니 브레너 (1927~2019)

영국의 생물학자·유전학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위트워터스랜드대학교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분자생물학연구소장과 분자유전학연구소장,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분자과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로버트 호비츠 (1947~)
미국의 생물학자·유전학자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에서 수학, 경제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워드휴즈 의료연구소, 맥거번 연구소, 미국 국립 인간게놈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존 설스턴 (1942~2018)
영국의 유전학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솔크생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생거센터 소장,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과학윤리위원회 공동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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