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삼순 씨의 칠순 2022.03.02

 

평생 흘린 코피를 모으면 냇가 하나는 족히 채울 것이다. 40대 중반부터 코피가 나기 시작한 삼순(여, 71세) 씨는 2~3일 간격으로 몇 시간이고 콸콸 쏟았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응급실과 입원, 수혈과 콧속을 지지는 치료를 반복했지만 병명조차 모르는 치료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언제 어떻게 쏟아질 지 몰라서,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일도 그만 두고 두문불출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20여 년. 대인기피증과 우울증까지 뒤따랐다.

 

정체 모를 코피

서른 여섯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삼순 씨는 식당 일을 하며 삼남매를 키웠다. 처음 코피가 났을 때는 10년간 쌓인 피로 때문인 줄 알았다. 어느 날 퇴근하는 버스에서 코피가 나기 시작했다. 옷소매에 닦는 것으로 모자라 버스 시트까지 붉게 물들였다. 부랴부랴 버스에서 내렸다.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어 길가의 잡초를 뜯어 코에 쑤셔 넣었다. 쓰러지기 전까진 어떻게든 집에 닿아야 했다. 어두운 시골길보다 무서운 건 이렇게 살아내야 할 앞으로의 인생이었다. 자녀들과 외식하던 날에도 어김없었다. 콧등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를 마주보고 바짝 엎드려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한참 후 “엄마, 여기 있어?” 첫째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추스를 새도 없이 코피 쏟는 모습을 들켰다. 딸은 겁에 질려 있었다. “엄마 어떡해. 어떡해….”

딸들은 시골에서 혼자 사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했다. “엄마 코피 안 났어?”매일 전화를 걸어 물었다. 삼순 씨는 별일 없다고 둘러대면서 혼자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가곤 했다. 응급 상황마다 달려오는 자녀들의 마음을 헤아리면 병원 침대도 불편했다. 인생을 끝내고 싶다는 바람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농약을 들고 뒤뜰로 나가는 중에도 코피가 쏟아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농약병은 나뒹굴고 등은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구나….’ 엉금엉금 기어가 수돗물로 마른 입을 적셨다. 핸드폰에는 딸들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있었다. 어쩌면 이미 달려오는 중일지 몰랐다. 삼순 씨는 얼른 농약병을 치우고 마당의 핏자국부터 씻어냈다.  

 

여기가 마지막

2015년 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장용주 교수를 찾아왔다. 20년 만에 듣게 된 병명은 ‘유전성 출혈성 모세혈관확장증’이었다. 코피가 심하게 나고 얼굴, 입술, 손가락 말단 등이 붉게 변색되는 증상의 유전병이었다. 장 교수에겐 치료 경험이 많은 질병이지만 삼순 씨 같이 심한 환자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랫동안 받아온 치료들이 오히려 삼순 씨의 혈관을 증폭시키고 더 큰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너무 낮아 언제 어떻게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이었다. 장 교수는 허벅지 조직을 콧속에 이식하는 수술을 진행했다. 하지만 워낙 비중격의 구멍이 크고 예민해서 이식으로 커버하지 못한 부분에서 계속 피가 나고 이식한 부위는 금방 떨어졌다. 마지막 병원이라 여겼던 삼순 씨의 가족들은 크게 낙담했다. 장 교수가 병실로 찾아왔다. “힘든 상황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찾겠습니다. 백세 시대에 칠순 잔치는 하셔야죠.” 가족들은 이제까지 많은 의사에게서 나쁜 소식을 들었다. 이대로 사는 도리밖에 없다는 의사도 있었고,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며 짜증내는 의사도 만났다. 누구 하나 장 교수처럼 해결 의지를 보인 적이 없었다. 삼순 씨와 자녀들은 그간의 상처와 절망을 위로 받은 듯 했다. “교수님이 뭘 하시든지 1%의 희망만 있으면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두렵지만 해볼게요

장 교수는 몇 달간 고민을 거듭했다. 코 안의 모든 점막을 제거하고 팔의 조직으로 대체시키는 수술을 고안했다. 코 안은 굉장히 울퉁불퉁한 구조여서 혈관을 전부 잇는 게 쉽지 않았지만 성형외과 최종우 교수가 할 수 있다는 대답을 내놨다. 다만 국내 첫 시도인데다가 엄청난 출혈이 예상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막상 수술이 두려운 삼순 씨에게 딸들이 울며 설득했다. “엄마, 수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병원에선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우리도 할 만큼 했으니 그거면 된 것 같아.”

수술은 1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기다리던 가족들은 수술실을 나온 의료진의 “보는 것만도 힘든 수술이었어요”라는 첫 마디에서 수술실 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술 후에도 삼순 씨는 보름 간 꼼짝 않고 기다려야 했다. “제가 생각한 대로 수술이 된 것 같아요”라는 장 교수의 이야기만이 희망이었다. 코피가 멈추면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렸다. 눈물 위로 미소가 번졌다.   

 

7학년 1반 삼순 씨

수술 후 어느덧 5년이 지났다. 딸에게 전화가 왔다. “삼순 씨, 병원에 혼자 잘 가고 있어?” “그럼~.” 건강을 되찾은 뒤 삼순 씨는 한글 학교부터 등록했다. 뒤늦게 배우는 한글 맛이 꿀맛이었다. 그전까진 글을 몰라 서울아산병원에 올 때마다 딸이 동행해야 했다. 이제는 표지판을 읽는 재미로도 혼자 병원 오는 길이 즐거웠다. 장 교수가 약속한 칠순을 맞이하며 얼마 전엔 가족과 식사도 나눴다. “내가 생명의 은인을 만나서 새로 태어난 아들 손주도 만나고, 울릉도 여행도 가보고, 칠순 축하도 받고. 나 정말 행복해!” 삼순 씨의 고백에 가족 모두 눈물 바다가 됐다. 삼순 씨가 아플 때는 참고 참았던 눈물이었다. 이제는 가족 모두 넉넉하게 울고 행복하게 눈물을 닦는다. 장 교수에게 감사 편지도 썼다. 당신 덕분에 맞이한 칠순이라고. 가족 모두를 살린 거라고. 평생 못 갚을 빚을 글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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