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의대생의 독서일기] 버나드 라운 ‘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2022.04.19

 

 

“우리 생각에는, 곧 죽을 사람이라고 포기하는 게 아닌가 싶어”
보호자가 말했다. 나는 보호자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의대생은 임상 실습이 시작되면 분과 별로 환자를 배정받는다. 실습생들은 환자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자세한 병력을 청취하고 신체 진찰을 한다. 여기에 각종 검사 결과와 의무기록을 종합해 증례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한다. 본과 3학년 초반의 증례보고서는 선배들의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 불필요한 내용이 많고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이 없는 문서다. 여기에 교수님의 호통 몇 번, 왜 똑같은 걸 자꾸 물어보냐는 환자분의 불평 몇 번, 그리고 밤샘작업 몇 번을 더하면 졸업 즈음에는 꽤 괜찮은 보고서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과 환자를 대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익힌 의대생들은 의사가 된다.

 

이처럼 증례환자 면담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대답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받는 귀찮은 과정이다. 증례 전, 미리 주치의가 협조를 구하고 실습생들도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지만, 환자가 협조를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어려 보이는 학생들의 경우, 애로사항이 발생하는 빈도가 높다. 하지만 환자와 라포 (Rapport, 공감을 통한 상호신뢰관계) 형성하는 것은 의사에게 필수적인 기술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필자의 경우 증례환자 면담이 비교적 원활했다. 그게 필자의 외모 덕분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에게 배정된 환자는 평생 농사를 짓던 분이었다. 갑자기 생긴 증상으로 연고지 의원에 내원하자 큰 병원에 가라는 권고를 받았고, 서울아산병원에 내원하셨다. 배정받았을 당시 영상검사상 특정 암이 강하게 의심되어 확진과 병기결정을 위한 검사를 받고 계신 상태였다. 이미 물어봤던 사항을 꼬치꼬치 캐묻고 신체 진찰을 하는 학생이 귀찮으실 법도 한데, 담당 의사가 두 명인 ‘특별 서비스’를 받고 있다며 음료수를 한 잔씩 챙겨주던 분이었다.

 

입원 7일차가 되는 날, 병기가 확정되어 화학요법을 담당할 종양내과 교수님과 사용할 약제까지 결정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환자의 암은 예후가 양호한 편에 들어 완치도 기대해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설명하러 병실에 가보니 분위기가 몰라보게 어두워져 있었다. 어쩐 일인지 묻자 무겁게 입을 떼셨다. 앞서 종양내과 교수님이 다녀가셨는데, 치료가 결정되었지만 항암제를 주사할 수 있는 병동에 자리가 없으니 댁에 가서 며칠 계시다가 다시 입원하자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치료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지루한 검사와 입원기간을 거치셨고, 항암치료를 시작하면 불편함이 많으실 테니 댁에 가서 며칠 쉬다 오시면 좋지 않나요?”

 

환자는 한숨을 푹 쉬고 답했다. “치료가 어려우니 포기하고 집에 돌려보내는 거겠죠. 치료가 되면 바로 시작하지 않겠어요?” 환자는 교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 배신감은 진짜였다. 치료가 곧 시작된다고, 병동에 자리가 나는 대로 입원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셨다. 믿고 찾아온 서울아산병원이 환자를 버렸다며 우울해 하셨다. 이러다가는 나중에 항암 병동에 자리가 나도 입원을 포기하지시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오해는 환자가 퇴원하기 전, 운 좋게 항암 병동에 자리가 생겨서 전동을 가신 뒤에야 풀렸다.

 

심장학계의 선구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버나드 라운 박사는 그의 책 ‘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의사의 말이 환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면서 한 중년 여성의 증례를 소개한다. 삼첨판협착증 (Tricuspid Stenosis) 환자로, 병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자리를 비워야 했던 담당의사가 환자를 ‘TS’라고 소개하자 갑자기 극도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Tricuspid Stenosis의 약자인 TS를 ‘말기 상태 (Terminal State)’로 오해한 것이다. 라운 박사는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의사들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 환자는 과호흡과 심계항진을 호소하다가 7시간 후 심한 폐부종으로 사망했다. 의사의 말을 오해한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르기에 충분한 공포와 스트레스를 느낀 것이다. 라운 박사는 의사들이 환자가 아니라 병에 집중하면서 치유의 전통이 훼손되었다고 말하며, 환자를 한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병동을 이동한 다음 날, 항암병동으로 환자를 찾아갔다. 환자는 밝게 웃으며 나를 맞았다. “고마웠습니다. 좋은 의사가 되세요”라는 그분의 말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그날의 경험으로 좋은 의사에 한걸음 가까워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인들로부터 의사의 말이 주는 위로와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담당 의사가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에 큰 상처를 받은 분도, 며칠 밤을 새워 걱정한 분도 있었지만,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해주던 의사의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계신 분도 있었다. 그러니 말의 무게를 알고, 잘 듣고 잘 말하는 의사가 되어야겠다. 말 한마디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천냥 빚만은 아닐 테니까.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은 2017년에 입학해 현재 본과 4학년 입니다.
현재 다양한 의학 분야 활동을 바탕으로 참된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생으로, 서울아산병원의 학생의사로 보고 들은 것들이 한 권의 책과 함께 울리는 순간들을 담은 독서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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