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선생, 콩나물 키워 본 적 있나?"
교수님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콩나물 국밥은 먹어 봤어도 콩나물을 직접 키워 본 적은 없었다. "의대 공부는 마치 콩나물 키우는 것과 같아. 콩을 시루에 넣고 물을 부으면, 그 물이 전부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이지. 의대 공부도 비슷해. 아무리 열심히 강의를 듣고 복습해도 시험을 본 다음 날이면 다 잊어버리니까." 모르시는 게 없어 보이는 교수님도 어리버리한 학생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나중에 시루를 열어보면 콩나물이 자라 있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아도 졸업할 때쯤이면 의사가 되어 있거든."
그 말을 들으니 ICM (Introduction to Clinical Medicine, 임상의학입문) 첫 강의의 기억이 떠올랐다. ICM은 울산의대 본과 1학년을 여는 강의로, 생화학, 생리학, 병리학과 같은 기초의학을 공부한 학생들이 내과를 필두로 한 임상의학 전반에 적응할 수 있게 돕는 과정이다. 당시 강의는 복통을 호소하는 모의 환자를 학생들이 돌아가며 진료하는 것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에 다들 당황했지만 모두 어떻게든 아는 내용을 쥐어짜며 의사 흉내를 냈다. 물론 결과는 처참했다. 장염인 것 같으니 수액을 맞고 지켜보자는 동기의 대답에 교수님의 호령이 떨어졌다. “장염인 걸 어떻게 알지? 어떤 검사를 할거야? 환자에게 설명해!" 동기가 머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피검사 하시죠." 교수님은 머리를 싸쥐었다. 당시엔 나도 피를 뽑아 분석기에 넣으면 병이 진단되는 줄 알았다. 희대의 사기극으로 끝난 엘리자베스 홈즈의 테라노스(Theranos)에 속아넘어갈 수준이었던 셈이다.
본과 4학년이 된 지금은 제법 의사다워 졌다. 외래 예진을 하고, 필요한 술기를 수행하고, 환자와 보호자의 간단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때때로 스스로의 모습과 옛날을 비교해볼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늘었음에 놀라웠다. 본과 3학년이 되고, 무대를 강의실에서 병원으로 옮기면서부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더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 답은 ‘의사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곱씹어보던 중 떠올랐다. 예과 1학년 당시 공자의 ‘논어’를 주제로 한 교양 강의를 들으며 배운 구절 몇 개가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는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 있는 말로, '옛것을 복습하고 새로운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의사를 뜻하는 영어단어 ‘Doctor’는 ‘가르치다’는 뜻의 라틴어 ‘Docr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사는 환자, 보호자, 그리고 후배 의사들을 끊임없이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선생’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의과대학 예과 2학년 2학기부터 본과 2학년 1학기까지의 시간은 ‘마의 구간’이라고 불린다. 구체적인 시점은 개별 의과대학마다 다르지만, 이 3년 남짓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이론수업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 동안 학생들은 인간에게 생길 수 있는 거의 모든 병에 대해 한 번씩 듣고 넘어간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의대생 공부량’ 이라는 제목으로 공유되는 사진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찍힌 것이다. 자연히 대부분의 유급도 이 시기에 발생한다. 울산의대는 블록제(block) 학사일정을 운용하기 때문에, 호흡기, 순환기, 소화기 등의 ‘블록’ 별 개별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공부한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시험을 치던 한 블록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주말 내내 공부하고 일요일 밤마다 의과대학 건물 로비에서 쪽잠을 잤다. 월요일 아침이면 출근하던 연구원들이 흠칫 놀라곤 했다. 지면을 빌어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게 옛것을 복습하고 새로운 것을 배웠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본과 4학년이 된 지금, 아직도 나의 지식은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경험은 일천하고 통찰은 얄팍하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지금, 의사 한 명의 몫은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긴다. 졸음과 싸워가며 공부하던 동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이미 지나 온 길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역시 위정 편에 있는 말로,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생각하지 않는 배움은 텅 빈 지식을 쌓는 것에 그칠 뿐이고, 지식 없이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미이다.
의사는 배운 것들을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해야 하고,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살피고 다시 공부해서 채워야 한다. 현장에서 적용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따라가는 의사는 환자와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법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그 지식이 옳은지, 옳다면 활용할 방법에 대해서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콩나물에 물을 주러 가야겠다. 잭이 심은 콩처럼 하루아침에 하늘에 닿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물을 주다 보면 콩이 열리는 콩나무가 될 테니까.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은 2017년에 입학해 현재 본과 4학년 입니다.
현재 다양한 의학 분야 활동을 바탕으로 참된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생으로, 서울아산병원의 학생의사로 보고 들은 것들이 한 권의 책과 함께 울리는 순간들을 담은 독서일기를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