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의대생의 독서일기]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2022.06.21

 

 

"Resolution (해상도)의 정의가 뭔지 아나?" 초음파 화면을 앞에 두고 교수님께서 물으셨다.

"두 점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맞다. 그럼 이 두 점이 하나로 보이면 뭘 하는지 아나?" 예약에만 몇 달이 걸리는 명의로 손꼽히는 교수님의 가르침이었다. 한 마디라도 놓칠 새라 귀를 쫑긋 세웠다. "그때 사람들은 결혼을 한다" 조원들이 키득댔다. 판독실 구석에서 웃음섞인 한숨도 들렸다.

 

그날 저녁, 동기들과 ‘우리는 언제쯤 점 두 개를 하나로 보게 될까?’ 라며 웃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에 속아 의대에 입학한 것으로 충분하다는 누군가의 답변이 돌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라는 푸념과 함께. 자리가 파하고 방에 들어와 생각했다. 나는 ‘이럴 줄 알고,’ 그러니까 지금 나의 모습을 예상하고 의과대학 원서를 썼던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 하나하나는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 중에서도 대학입학, 취업, 결혼, 이직과 같이 큰 영향이 오랫동안 미치는, 그래서 중요한 선택들이 있다. 이러한 선택들 앞에서 우리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며 장고(長考)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다양하고 많은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한국 최고의 명문 S대 의과대학에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드라마 ‘SKY캐슬’이 전파를 탄지도 4년이 지났지만, 의과대학 입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은 그때 못지않다. 강남 학원가는 불이 꺼지지 않고, 여의도에서는 고위공직자가 진땀을 뺀다. 후배들만큼 뜨거운 입시를 겪은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지만, 필자 역시 더없이 치열한 2016년의 여름을 보냈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의과대학 합격증을 받으면 ‘꽃길’만이 펼쳐질 줄 알았다. 예과 1학년이 끝나자 그 망상은 재빨리 사라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 수업과 빡빡한 일정이 여러 밤을 새우게 했고, 매주 있는 시험과 성적의 압박이 조여왔다. 야속하게 울리며 잠을 깨우는 알람을 향해 손을 뻗으며 오전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문자가 와 있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다. 물론 그런 적은 없었다. 실습생이 되자 의대생의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힘들고 바쁜 선배들의 삶을 보게 되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산처럼 쌓아 받아가는 선생님을 보고 ‘한국인들은 어떻게 이렇게 많이 먹고도 살이 찌지 않냐’라는 포르투갈 교환학생의 질문에 ‘그들은 주 80시간을 일해서 그렇다’라고 답했으니 말 다했다. 이렇게 힘든 것을 보면 진로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 스캇 펙은 석가모니의 ‘삶은 고해(苦海)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책을 시작한다. 삶은 진정으로 힘든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많고 적음은 있지만, 어떤 선택을 해도 고통은 반드시 따르는 것이고 고통스럽다고 해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이야기는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저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일하며 경험한 ‘완벽한 직업’과 ‘운명적인 배우자’를 찾아 헤매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른 직업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가진 환자들이 스스로 변할 수 있도록 돕고 위로하며 때로는 따끔하게 혼내어 환자들의 회복을 돕는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힘들고 지쳐도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택을 주저하거나 이미 한 선택을 후회할 필요가 없다. 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선택은 없다. 어려움이 없는 길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다고 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려 한다. 물론 가던 길에서 내려와 다른 길을 선택한다 해도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원래 가던 길, 새로 가는 길, 그리고 중간에 헤맨 과정까지도 그 사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길을 선택해도 어려움은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도 잘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내가 갈 길에 한 발자국을 더한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우리 모두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응원하는 의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은 2017년에 입학해 현재 본과 4학년 입니다.
현재 다양한 의학 분야 활동을 바탕으로 참된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생으로, 서울아산병원의 학생의사로 보고 들은 것들이 한 권의 책과 함께 울리는 순간들을 담은 독서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보다 건강한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뒤로가기

서울아산병원 뉴스룸

개인정보처리방침 | 뉴스룸 운영정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