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을 바쳐 교과서 한 줄을 바꿨다네.”
“현상을 잘 관찰하다 보면 규칙이 보이고 규칙을 세워 놓으면 질문이 생기지. ‘이 환자분의 사례는 왜 규칙을 따르지 않지?’ ‘변수 하나를 바꾸면 더 구체적으로 환자들에 대한 규칙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따위의 질문 말이네. 임상의사는 결국 연구자이기에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쓸 수 있어.”
울산의대는 학사 교과과정으로 ‘의학연구실습과정’을 운영한다. 학생 한 명당 교수님 한 분을 배정해 연구의 기본을 배우고 교수님의 연구팀에 소속되어 연구를 진행한다. 목표는 임상의사에게 필요한 연구능력을 배양하고 가능하면 졸업 전 SCI급 논문을 1저자로 작성해 투고하는 것이다. 학교는 학점과 연구비를 배정해 주고 서울아산병원의 어느 교수님이건 지도를 부탁드려도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본과 1학년이 갓 끝난 나는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가 고졸의 연구를 지도해 달라는 당돌한 부탁을 하고 있었다.
“논문이 모이면 체계적 고찰이 된다. 이 과정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게 되고 연구자의 의견은 난도질을 당하게 되지. 그걸 버텨내면 비로소 교과서에 쓰여진다네. 나는 내 인생을 바쳐 ‘가습기 살균제에 의해 폐손상이 유발될 수 있다’고 교과서 한 줄을 바꿨어.” 고개를 끄덕였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자 내가 교수님께 지도를 부탁드리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자, 그럼 자네의 질문은 무엇인가?” 나의 의학연구실습과정이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대학병원 의사의 3대 책무로 진료, 교육, 연구가 꼽힌다. 세상에는 셋 중 하나만 하는 직업도 많은데 세개 모두 하다 보니 교수연구실의 불은 밤에도 꺼지지 않는다. 진료는 환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교육은 후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며, 연구는 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임상의사에게 연구와 논문 발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학계에는 ‘publish or perish(논문을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환자를 진료하는 데에만 써도 시간이 부족한데 왜 연구를 해야 할까? 작가가 소개한 이그나츠 제멜바이스(1818-1865)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코로나19로 개인 방역 수칙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요즘이다. 우리 모두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850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오스트리아의 빈 종합병원에 근무하며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병원의 1병동과 2병동 사이에 산욕열(puerperal fever, 출산 후 2일에서 10일 내에 38℃ 이상의 고열이 지속되는 경우)이 발생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항생제가 발견되지 않았던 당시에 산욕열은 치명적인 질병이었고 수많은 산모들이 고통스럽게 사망했다. 두 병동 사이의 차이는 너무 유명해져서 1병동에 배정받은 산모들이 제발 2병동으로 바꾸어 달라고 애원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렇게 병동 간 산욕열 발생에 차이가 있다는 현상은 빈 시민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이 현상을 관찰해 적절한 규칙을 발견한 사람은 제멜바이스뿐이었다. 그는 1병동에서는 의과대학생들이 진료에 참여했지만 2병동에서는 산파들만 진료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의과대학생들은 산욕열로 사망한 환자의 부검에 참여한 뒤 손을 씻지 않고 다음 환자를 진료했고 의도치 않게 환자에서 환자로 산욕열을 전파시켰다. 그렇게 제멜바이스는 손을 씻는 것이 병원체 전염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이 되었다. 그의 발견은 당대에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인류에게 ‘손씻기’의 개념과 중요성을 알려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지켰다.
의학연구실습과정을 거치며 주 단위로 이루어지는 연구실 미팅에 참석했고 여러 연구원들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분석했다. 뛰어난 선배들의 이야기를 학회에서 듣기도 했고 나의 초록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이제는 논문만을 남겨 두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미래의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지식을 발견해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리라 믿는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뒤에는 지난날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던 ‘이단자’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사악한 이단자들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 체계를 흔들며 의학의 진보를 이끌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유쾌한 이단자들이다.
내가 ‘유쾌한 이단자’가 되기 위한 능력을 키워주신 여러 교수님들과 연구원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며 글을 마친다.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은 2017년에 입학해 현재 본과 4학년 입니다.
현재 다양한 의학 분야 활동을 바탕으로 참된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생으로, 서울아산병원의 학생의사로 보고 들은 것들이 한 권의 책과 함께 울리는 순간들을 담은 독서일기를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