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의대생의 독서일기] A.J. 크로닌 ‘성채’ 2022.10.25

 

 

“수고 많으셨습니다.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 문을 열고 나왔다. 의사국가시험 실기가 끝났다. 의사국가시험은 실기와 필기를 각각 응시한다. 실기 시험은 모의진료(CPX)와 술기(OSCE) 시험으로, 그 특성상 국시원 실기시험센터에서만 응시가 가능해 9월부터 11월 사이의 날짜를 무작위로 배정받아 응시한다. 필기 시험은 실기 시험이 모두 종료된 뒤 전국 39개 의과대학의 학생들이 같은 날짜에 권역별 시험센터에서 응시한다. 이 두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의사면허를 교부받을 자격이 생긴다. 실기 시험을 끝낸 지금 절반 정도는 의사가 되어 시험장에서 떠난 셈이다. 지면을 빌려 의사면허 실기 시험에 도움을 아끼지 않은 서울아산병원 시뮬레이션센터와 울산의대 의학교육실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의사의 자격은 면허로 관리된다. 면허는 별개의 행위마다 얻어야 하는 허가를 면제한다는 표현이다. 즉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행동을 특별한 자격을 취득한 사람들에 한하여 허락하는 개념이다. 반면 자격증은 모두에게 허용되는 행위를 일정 수준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증명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의료인이 아니면 의료행위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의사 ‘자격증’은 잘못된 표현이다. 운전면허가 없으면 운전을 할 수 없지만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이 없어도 문서 작업은 할 수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의사가 되면 1년의 인턴, 3년 또는 4년의 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된다. 전문의 자격은 면허가 아니라 자격증으로 관리된다. 따라서 특정 분과의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지 않더라도 해당과의 진료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듯 배타적인 권한을 허락하는 의사면허는 생각보다 무겁다. 한 사람의 출생과 사망을 법적으로 보증해야 하고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적시에 받도록 도와야 한다.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위법하거나 잘못된 상황에 맞서야 할 수도 있다. 의료기관의 대표자가 되면 한 기관의 운영 방침 전반을 결정해야 한다. 의학의 고전인 ‘해리슨 내과학(Harrison's Principle of Internal Medicine)’의 서문에 ‘한 인간에게 의사가 되는 것보다 많은 기회, 책임, 의무가 주어지는 일은 없다’는 글이 적혀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외래 예진을 하며 의사의 책임에 대해 처음으로 느꼈다. 교수님께서 본격적인 진료를 보시기에 앞서 환자를 만나 병력 청취와 간단한 신체 진찰을 하고 주요 소견을 의무기록에 적어 교수님께 전달하는 일이다. 얼핏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교수님께서도 필요한 질문을 모두 하시기 때문에 학생의사가 환자의 진료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환자가 병원에서 마주하는 첫 얼굴일 뿐만 아니라 라포(Rapport: 환자와 의사의 신뢰관계)를 훼손하는 경우 원활한 진료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특히 주의했던 것은 환자가 특정 대답을 하도록 이끄는 유도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처음에는 환자와 단 둘이 마주하는 것이 꽤나 무서웠다. 질문을 빠뜨리면 어쩌지,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초반에는 그 걱정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 전공의 선생님이 10분이면 끝낼 예진을 30분이나 하다가 외래 마감 시간이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숙련도는 조금 나아졌지만 잘못된 의학용어로 의무기록을 작성해 교수님께 혼이 난 날도, 환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진땀을 뺀 날도 있었다. 면허시험까지 응시한 마당에 당장 내년부터 의사라는 일의 무게를 받아들이기에 아직 부족하지는 않은지 고민됐다. 그러던 중 마찬가지로 막 의사 면허를 받은 ‘성채’의 주인공 앤드루 맨슨을 만나게 되었다.

 

앤드루는 공중보건에 영향을 미치는 하수구를 시청에서 보수해주지 않자 주민들의 건강을 위해 하수 시설을 폭파할 정도로 사명감이 넘치는 젊은 의사였다. 하지만 어느새 돈과 명예의 단맛에 취해 환자의 건강을 등한시하게 된다. 앤드루는 환자와 아내를 잃고 나서야 자신이 가진 의사라는 직업의 무게를 진정으로 깨달으며 인간적인 성장을 이룬다. 그리고 의료체계의 경직성과 더불어 공부를 게을리하는 현업 의사들의 행태를 꼬집으며 환자의 이익을 변호하는 의사가 된다.

 

그의 성장기를 곱씹으며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과 하루하루 발전하는 지식을 가진 의사의 삶을 그려보았다. 평생을 의사로 일해도 ‘의사란 이런 것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름의 의사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윤성민 학생은 2017년에 입학해 현재 본과 4학년 입니다.
현재 다양한 의학 분야 활동을 바탕으로 참된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생으로, 서울아산병원의 학생의사로 보고 들은 것들이 한 권의 책과 함께 울리는 순간들을 담은 독서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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