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 선생님 어디 있나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 이젠 날 부르는 게 아니지. 병동 한구석에서 후배가 걸어 나왔다. 빳빳한 와이셔츠. 깔끔하게 묶인 넥타이. 푹 자고 와 또렷한 눈빛. 학구열이 가득한(?) 표정. 그래. 작년엔 나도 저랬지. 이제 나는 의사라 적힌 명찰을 달고 출근한다. 나는 서울아산병원 인턴의사다.
보통 인턴은 일정 기간 업무를 체험하게 하는 채용 형태를 말하지만, 의사직의 ‘인턴’은 의미가 다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흔히 일반의라 부르는 의사가 되고 수련을 받기로 결정하면 1년의 인턴 과정을 거쳐 분과를 선택한다. 이어서 3년 또는 4년의 전공의 과정을 거치고 시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전문의가 된다. 인턴은 전문과목을 선택하기 전 일반의 신분으로 다양한 분과에서 근무하며 수련하는 의사를 말한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응급의학과 근무는 반드시 포함해야 하지만 다른 분과는 배정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매달 근무지를 바꾸기 때문에 인턴은 항상 어딘가 미숙하고 열심히 배워야 하는 입장이다.
매일매일이 바쁘게 돌아가는 대학병원이지만 가장 정신없는 달을 고르라면 단연 3월이다.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 의료인이 입사하고, 모든 연차의 선생님들이 연쇄적으로 진급하며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인턴은 더더욱 정신이 없다. 3월 인턴이 부족하게나마 제 몫을 해낸다면 그건 스스로 적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 일을 가르쳐준 어느 전공의 선생님의 희생 덕분이다.
매사 계속 질문하며 헤매던 인턴 첫 주 동안 마주친 선배들에게 인턴 생활이 어땠냐고 묻자 다양한 답을 얻었다. 누군가에게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 누군가에게는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힘들지만 재미있고 많이 배우게 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이 칼럼을 통해 병원을 신선한 눈으로 바라보는 초보의사의 성장기를 나누고 싶다. 그러니 오늘도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한 발이라도 더 뛰는 인턴의사가 되기 위해 정신없이 울리는 호출 전화를 받아 외친다. "네, 인턴입니다!"
[분홍색 모자]
수술장은 감염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체 복장 규정이 있다. 깨끗한 수술복을 입고, 전용 신발을 신고,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도록 모자를 쓴다. 외과계 선생님들은 일본의 초밥 장인을 연상시키는 면 모자를 쓰시는 경우도 있다. 개성 가득한 모자는 어느새 그 선생님의 상징이 되고는 한다. 병원에서 지급되는 일회용 모자의 색은 둘로 나뉜다. 직원용은 파란색이고 방문객용은 분홍색이다. 수술장에는 보호자나 병문안객이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분홍색 모자는 주로 외부 실습생과 의료기기를 관리하는 선생님들이 착용한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소아 환자는 수술 대기실에서 수술장까지 보호자가 동행한다. 환아를 수술 전 대기실에서 수술장으로, 수술이 끝나면 회복실로 이동시키는 일은 인턴의 업무다. 대기실에는 뽀로로, 핑크퐁, 아루미(어린이병원 마스코트), 자동차 모양의 휠체어가 있다. 이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환아를 수술장 안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것은 부모님의 웃는 얼굴이다. 환아와 부모님이 모두 분홍색 모자를 쓰고 수술장으로 들어간다. “우리 OO이 이제 쓩 들어가네!” 휠체어가 움직이면 부모님과 멘트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빠르게 수술장으로 들어간다. 환아가 수술 침대에 눕는다. 부모님은 옆에 서서 환아를 안심시킨다. 얼굴은 웃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산소 마스크가 환아의 얼굴을 덮고 마취 가스 냄새가 방 안에 훅 퍼진다. 환아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제가 밖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순간, 부모님의 눈물이 왈칵 터진다.
대기실로 나가는 길에서 큰 소리로 울다 애써 담담하지만 촉촉한 눈으로 수술에 대한 질문을 하는 부모들도 있다. “걱정 마세요. OO이는 잠든 줄도 모르고 일어날 겁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 즈음 대기실에 도착한다. 수술에 대한 설명이나 약속을 감히 하기에는 나의 지식과 역할이 제한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모의 삶에서 가장 길게 느껴질 몇 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만나는 의사다. 그러니 작지만 내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복실에서 당황하시지 않도록 설명을 해 드린다. “수술이 끝나면 회복실로 들어오시라고 방송을 해 드립니다. 마취에서 깨는 동안에는 과격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성인으로 치면 술에 취한 것과 비슷합니다. OO이가 울거나 팔다리를 휘저어도 놀라지 마시고 꼭 안아서 안심시켜 주시면 곧 회복합니다.” 부모님께서 마음을 추스르고 대기실로 들어가시면 나는 다시 수술방으로 달려간다. 늦었다고 혼나기 전에 수술 세트를 준비해야 한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아는 것도 적고 할 줄 아는 것도 적은 초보의사이다. 환자 이야기를 들어주고 눈도 한 번 더 맞추고 힘들다고 하면 한 번 더 위로를 건네는 인턴이 되고 싶다. 그것만큼은 내가 잘 할 수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이 칼럼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주인공을 알 수 없도록 약간의 수정을 거쳤음을 밝혀 둔다.
교육수련실
윤성민 인턴
윤성민 인턴은 울산의대 졸업 후 2023년 3월부터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매달 여러 진료과를 경험하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느낍니다.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환자와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의료인이 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2022년 1기 필진으로 활동하며 [의대생의 독서일기]를 연재하였으며, 금년 2기 필진에도 선정되어 초보의사의 성장기 [네, 인턴입니다]를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