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네, 인턴입니다!] 우리 곁의 평범한 이웃들 2023.07.12

 

 

"선생님, Femoral Sheath(대퇴동맥 유도초) 제거해주세요". 

업무용 전화기에 알림이 뜬다. 뇌혈관 질환을 치료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개두술(머리를 여는 수술)도 방법이지만, 상황이 허락한다면 동맥을 통해 뇌혈관으로 접근해 피가 나는 곳을 막거나 막힌 혈관을 뚫는 등의 치료를 할 수도 있다. 이는 중재적 방사선 치료라고 불리며, 두개골을 열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당연히 인턴이 할 수 있는 시술은 아니다. 나의 역할은 시술이 끝난 후 혈관에 접근하기 위해 대퇴동맥에 삽입되어 있던 관을 안전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물품을 준비하고 환자를 확인한 다음 관을 살펴본다. 얇은 빨대 굵기의 관이 심장 박동에 맞춰 흔들린다. 통, 통, 통…. 관을 뽑기 전에 설명을 한다. "제가 이 관을 뽑고, 피가 멈추도록 꾹 누를 겁니다. 이 관은 대퇴동맥이라는 아주 두꺼운 혈관에 들어가 있어요. 피가 나지 않도록 강하게 누르기 때문에 아플 수 있습니다." 소독하고 혈관을 누른 채 관을 뽑는다. 심장 박동에 맞추어 선홍색 피가 흘러나온다. 거즈를 접어 출혈 부위를 강하게 누른다. 이제 지혈이 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 안전한 지혈을 위해서는 15-20분 정도 압박이 필요하다. 안 그래도 더운 병실에서 몸에 힘을 주고 서 있다 보면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솟아오른다. 커지던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안경에 땀이 떨어지지 않게 고개를 들어보니 맺힌 것은 내 땀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보호자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보호자가 환자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여보, 많이 아파?"

 

평소 드레싱, 채혈 등의 술기를 하는 중에 환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 노력한다. 환자와 의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은 다르다. 부정확하고 두서 없는 환자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내고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 ‘병력’을 만드는 것은 진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자 좋은 의사의 자질이다. 다만 그러다 보면 ‘의사가 들어 주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마음 속에 쌓인 환자가 생긴다. 나는 주치의도, 담당의도 아니지만, 나를 붙잡고 쌓인 이야기를 하는 환자를 종종 만난다. 사정이 허락할 때에는 몇 분의 시간을 내어 그 이야기를 들어드리곤 한다. 그럼에도 20분을 오롯이 한 환자 곁에서 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며 어차피 자리를 뜨지 못하니 이야기라도 들어드릴까 싶어 입을 열었다. "병원 생활에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활이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얘기를 듣다 보니, 그동안 만난 환자들이 생각났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퇴근할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 일상을 보내며 직장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어쩌면 사회인 동호회에서 만나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차 자리 문제로 감정이 상했을 수도 있는 이웃. 머릿속에 있는 혈관 하나가 불룩하게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입원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고, 서울아산병원은 그저 올림픽대교를 건널 때마다 보이는 건물이었을 터이다.

 

재활의학과 실습 중 장애에 대한 강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들은 "장애인은 장애라는 행성에서 지구 침략을 온 외계 생명체가 아닙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환자도 마찬가지다. 질병의 행성에서 환자복을 입고 온 사람들이 아니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다가 예상치 못한 병으로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이자, 건강하고 평범한 일상을 간절히 되찾고 싶어하는 분들이다. 아프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손을 떼도 피가 나오지 않을 무렵 이야기가 끝났다. 지혈대를 묶고 4시간 동안 일어나지 말라는 말과 함께 한 마디를 더 던졌다. "이렇게 다정한 남편분을 두셔서 참 좋으시겠어요." 보호자님이 멋쩍게 웃는다. 한 마디 더 거들어 본다. "눈빛만 봐도 두 분이 정말 사랑하시는 게 느껴지네요." 두 분이 서로 바라본다. 멋쩍은 웃음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다음 날 드레싱을 위해 방문하자 두 분이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특히 보호자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가정의 평화에 기여한 듯해 뿌듯했다. 웃으며 퇴원 준비를 하는 두 분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조심히 퇴원하세요. 병원에서는 다시 뵙지 않길 바랍니다."

잠시 입고 있는 옷이 다를 뿐, 병원에 있는 모두가 평범한 나의 이웃임을 되새기며 일하는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교육수련실
윤성민 인턴

윤성민 인턴은 울산의대 졸업 후 2023년 3월부터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매달 여러 진료과를 경험하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느낍니다.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환자와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의료인이 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2022년 1기 필진으로 활동하며 [의대생의 독서일기]를 연재하였으며, 금년 2기 필진에도 선정되어 초보의사의 성장기 [네, 인턴입니다]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보다 건강한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뒤로가기

서울아산병원 뉴스룸

개인정보처리방침 | 뉴스룸 운영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