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일곱 번 넘어져도 울지 않는 이유 2023.07.18

 

 

은지 씨의 투병기는 아버지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내 딸이 잘못되기만 해 봐!” 동네 종합병원에서 한 달째 병명을 찾지 못하자 아버지는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의사의 멱살까지 잡았다고 한다. 결국 죽어가는 막내딸을 안고서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했다. 단 이틀 만에 혈액암의 일종인 비호지킨 림프종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무거운 병명에도 딸을 살릴 병원을 찾았다는 안도가 먼저였다. 1997년 은지 씨가 세 살 때의 일이다. 꾸준한 치료로 초등학교에 입학해선 완치 판정도 받았다. 그리고 13살. 확장성 심근병증이라는 새로운 병을 얻었다. 은지 씨의 기억은 거기서부터다.  

 

슬픔을 함께 짊어진 사람들

심장근육 이상으로 심실 확장과 수축 기능에 장애가 생기는 희소 난치성 질환이었다. 숨이 차서 걸을 수 없고 기절한 것도 여러 번. 약물 치료로는 차도가 없었다. 심장이식을 신청하자마자 운 좋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수천만 원에 달하는 수술비를 당장 마련할 수 없었다. 딸의 병간호로 일자리를 한번 잃었던 아버지는 집도, 땅도 처분한 상태였다. 두 오빠는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9살 때 갑작스레 어머니를 잃은 터라 간병은 할머니의 몫이었다. 가족의 희생과 애달픔을 은지 씨는 제법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이식을 포기하고 며칠 후에 기적처럼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선천성심장병센터에서 근무하던 임유미 간호사가 치료비를 지원받을 방법을 찾아 보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어린 은지 씨에게는 “내가 엄마는 되어줄 수 없어도 네 이모는 되어 줄게”라는 말이 든든하게 들렸다. 아산사회복지재단과 한국심장재단 등에서 치료비 지원이 이어졌고 다니던 초등학교와 인근 학교에서 모금 활동이 펼쳐졌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선의가 두 번째 삶의 기회로 이어졌다.

 

누군가의 심장을 안고 산다는 것

막상 이식 수술을 앞두자 은지 씨는 두려웠다. 한참 울다가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울수록 아빠는 더 힘들고 무섭겠지?’ 그 순간 눈물이 멈췄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아빠 파이팅!”하고 웃었다. 아버지는 딸이 되려 자신을 위로해 줬다는 생각에 수술을 기다리는 내내 울었다. 마침 세찬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소아심장외과 윤태진 교수의 집도로 수술은 순조롭게 마쳤다. 그러나 감염 우려에 1년간 집에서만 지내며 모든 음식을 익혀 먹고 수건 한 장까지 삶아 썼다. 매일 약을 한 움큼씩 삼키다 보면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살려면 먹어야지”하고 물컵을 건네던 아빠는 진짜 이유를 말해주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안고 사는 거잖아. 이식해 준 사람을 생각하면 스스로 건강을 챙길 줄 알아야 해.”

거부반응과 약 부작용으로 얼굴이 달덩이처럼 붓고 털이 나기 시작했다. 예민한 십대 시절, 사람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 앞의 합기도장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힘들면 쉬어도 좋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야!” 관장님의 격려와 배려에 몸을 단련하고 땀을 흘리며 자신감을 채워나갔다. 

 

만만치 않은 세상을 견디는 법

체육을 전공하고 싶지만 체력의 한계가 분명했다. 취직도 여의치 않았다. 운 좋게 면접을 보게 되면 심장이식 받은 사실을 미리 알려야 할지 망설여졌다. 정기적인 진료 스케줄과 언제든 응급실에 갈 수 있는 상황을 배려해 줄 직장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심혈관 질환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 이식 이후의 경험과 조언을 남겼다. 그중 갓 심장 이식을 받은 심비대증 환자가 따뜻한 조언에 고마워하며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재원 씨를 처음 만났다. 서로의 아픔을 잘 알아서인지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이식 환자라는 이유로 결혼을 남의 이야기처럼 여기던 둘은 자연스럽게 평생을 약속하고 있었다.   

“아빠, 할 말이 있는데 화 안 낼 자신 있어?” 은지 씨는 재원 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픈 딸이니까 건강한 사람을 만났으면 했는데….”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아프면 감당할 수 있겠냐는 아버지의 질문을 예상하던 찰나였다. “네가 좋으면 된 거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거야.” 2023년 6월 11일. 은지 씨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식장을 걸어 나갔다. 이번에도 “아빠 파이팅!”을 외치며 웃었다. ‘아빠 고마워’라는 말 대신이었다. 

 

조용한 응원

재작년부터 거부반응이 용혈성 빈혈로 나타나 약이 늘고 진료도 잦아졌다. 어른이 되어도 견디기 힘든 치료는 있었다. 곳곳의 피멍과 통증으로 꺽꺽거리며 울 때 소아청소년심장과 유정진 교수가 은지 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심한 듯 따뜻한 응원이 전해졌다. “아빠는 서울아산병원 의료진분들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자주 말씀하셨지만 저는 워낙 어릴 때부터 치료받다 보니 그 의미를 잘 몰랐어요. 다 크고 나서야 하나씩 알게 되는 거죠. 소아청소년심장과 김미진 교수님은 전공의 시절에 담당 환자도 아니었던 저를 자주 찾아와 안부를 물어봐 주셨어요. 병동 간호사분들은 SNS로 여전히 저를 응원해 주시고요. 사소한 인연도 제게는 참 소중해요.”

건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은지 씨가 일찍 알아버린 사실이다. 그렇다고 버티는 순간마다 서글프거나 외로운 것만도 아니었다. 아무 대가 없는 생명의 나눔과 가족의 사랑, 의료진의 최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온라인 카페에서 치료 결과가 좋지 않거나 목숨을 잃은 환자들의 사연을 접하면 밤잠을 설친다. 남편은 일일이 마음 쓰지 말라고 타이르지만 ‘그건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라고 답한다. “한 사람에게라도 희망과 응원이 될 수 있다면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그러다 혹시 제가 상처를 받더라도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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