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아빠의 행복한 순간 2023.08.21

 

 

피에도 냄새가 있다는 걸 아빠를 통해 알았다. 2007년 어느 날 코와 입으로 핏덩어리를 쏟아낸 이후 아빠는 십수 년을 매일같이 피를 토하고 수혈받으며 지냈다. 위암이었다. 되돌아보면 지역 병원의 치료 방향은 현상 유지에 불과했다. 발병 당시 삼 남매를 키우는 마흔다섯 살의 가장으로 일을 그만둘 수 없어 적극적인 치료를 미룬 게 아닐까 싶다. 정작 우리들은 어려운 가정형편과 집 곳곳에 밴 피비린내, 엄마의 마음고생 등을 이유로 아빠를 오랫동안 미워해 왔다.

 

왜 그랬어, 아빠

2017년 병원에서 이러다 죽을 수 있다면서 서울의 대형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동생들과 아빠를 부축해 서울아산병원을 찾아왔다. 종양내과 류민희 교수님은 CT 결과를 보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심지어 아빠조차 정확한 몸 상태를 그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거대한 종양이 주변의 식도, 췌장, 비장, 대장을 모두 침범해 출혈을 일으켜 온 것이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하신 건가요?” 교수님의 진지한 질문에 나 역시 아빠에게 묻고 싶었다. 위암을 처음 발견했을 때 수술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순 없었냐고. 왜 이를 악물고 10년씩이나 버텼냐고. 아빠는 그저 “그만 살고 싶다”라는 말뿐이었다. 교수님은 일단 해볼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며 아빠를 다독였다. 서울과 담양을 오가며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허리춤에 찬 주머니는 위와 폐에서 샌 음식물과 피로 금방 부풀었다. 지켜보는 가족들도 괴로움을 마음 한구석에 채워갔다.

 

“아빠도 두려워”

2019년 호흡 장애가 발생하고 위장관 폐색으로 아빠는 물조차 마시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서 100kg에 육박하던 예전의 모습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위장관외과 김범수 교수님은 아빠의 상태로는 수술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도움이 못 돼 미안하다면서. 우리는 단념하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하루하루 버티던 아빠가 “너무 무섭고 아파”라며 진심을 토해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빠에게도 두려운 일이었구나!’

“가실 때 가더라도 밥은 먹이고 싶어요.” 간절한 바람을 김 교수님께 다시 전했다. 사망 가능성이 높은 수술이지만 김 교수님은 결국 우리 편에 서주었다. 식도 일부를 포함한 위와 췌장, 비장, 대장의 절제술을 시행하고 식이용 소장루 수술 등 두 차례 큰 수술이 이어졌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아빠를 힘들게 해야 하냐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우리가 품은 희망이 한낱 객기처럼 느껴졌다. 수술 후 중환자 치료를 받던 아빠의 회복 소식만 기다렸지만 마지막을 준비하러 오라는 병원의 연락을 받았다.

삼 남매가 급히 휴가를 내고 서울로 향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자책하지 말자”라며 엄마는 우리를 다독였다. 아빠는 배가 열려있는 상태로 수술 부위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보고도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수목장을 알아보면서도 우리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아빠 스스로 이겨내야 할 순간이었다. 

 

희망은 기적으로

간호사분들은 아빠와 영상통화를 할 수 있도록 틈틈이 배려해 주었다. 잠든 아빠의 호흡 소리만 들릴 뿐 이지만 아빠 혼자서 외롭지 않도록 우리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보이지 않더라도 무서워 마세요. 곧 만날 거예요~” 예전에 아빠와 병원을 산책하다가 수술한 환자들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의식이 없을 때 가족이나 의료진이 한 이야기가 모두 기억나더라고. 우리는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사경을 헤매던 아빠가 눈을 뜨고 엄마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를 본 아빠는 꼭 이겨 내겠다고 힘겹게 약속했다. 그리곤 가래를 스스로 뱉으며 회복의 여지를 보여 주었다. 수많은 장비를 대동한 채 병실에 올라가자마자 일어섰고 죽도 입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김 교수님조차 아빠의 회복 속도에 놀란 눈치였다. “교수님이 수술해 주신 덕분에 우리 가족이 기적을 봤어요!”라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머리로는 납득하기 힘든 시도를 가슴으로 승낙해 준 걸 알고 있었다. “이건 아버님의 의지로 해낸 겁니다.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요. 살아 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김 교수님은 최대한 안정될 때까지 아빠를 보살피며 함께 기뻐해 주었다. 병동의 환자들이 찾아와 아빠에게 회복 비결을 물었다. “나 살겠다고 자식들만 고생시킨 것 같아”라며 의기소침하던 아빠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 있었다.

 

행복한 모습을 담는 시간

‘좋아하는 커피 좀 평소에 많이 사드릴 걸…’ 아빠가 물도 삼키지 못할 때 마음에 사무친 후회였다. 요즘은 외래 날마다 커피 두 잔을 사서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아빠는 커피 맛에 감탄하면서 옛이야기를 술술 꺼낸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일곱 살 때부터 돈을 벌면서, 주변 사람들을 돕겠다고 보증을 잘못 서면서 겪은 인생의 굴곡이 참 많았다. 아빠의 서툴러 보였던 선택과 행동들이 차츰 이해됐다. 우습게도 내가 아빠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건 병원에서 사망 예고를 들은 순간부터였다.

아빠는 의욕적으로 밭을 일구며 지낸다. 아직은 환자라 힘든 일은 무리라고 말려도 “피를 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라며 웃어넘긴다. 지나가던 할머니의 장바구니까지 대신 들으려는 아빠의 극성에 잔소리가 나오는 찰나, 엄마가 내 옆구리를 친다. “내버려 둬! 이게 아빠의 행복이야.” 가만히 아빠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언젠가 아빠와 이별하는 순간에 이 모습을 기억하게 되리란 걸 예감했다. 아빠의 행복한 모습을 눈에 담을 시간이 주어져서 정말 다행이다.

보다 건강한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뒤로가기

서울아산병원 뉴스룸

개인정보처리방침 | 뉴스룸 운영정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