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나를 있게 한 환자] 20년 전 체한 라면 2023.09.01

 

 

정신건강의학과에 처음 오시는 환자 중에는 굉장히 엉뚱한 주 호소를 가지고 오는 환자가 꽤 있다. 아직도 말 한마디까지 생생히 기억나는 70대 노인 환자가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처음 방문하면 대기시간 동안 초진 문진표를 작성하게 되는데, 그 종이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주 호소다. 주 호소란 오늘 이곳에서 진료를 보게 된 가장 불편한 부분을 말한다. 그날 70대 환자의 주 호소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20년 전에 체한 라면이 안 내려갑니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정신과를 찾아오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몸이 불편할 때 바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여러 진료과를 전전하며 할 수 있는 검사들을 다 하고 먹을 수 있는 약을 다 먹어 봐도 차도가 없으면, 해당 과 의사 선생님은 환자에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권하게 된다.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이거라도 해 보자’는 마음으로 내원한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이를 ‘신체증상장애(Somatic Symptom Disorder)’라 한다. 환자들은 하나 이상의 신체 증상을 호소하고 이로 인해 고통스럽고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받는다. 한 가지 증상이 계속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신체 증상 자체는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환자는 신체 통증이 정신건강의학과의 영역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해당 통증과 관련된 진료과에 찾아가 다수의 검사를 하고 대증 치료(원인이 아닌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를 받게 된다. 일시적으로 증상이 경감되는 듯하지만 증상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심하면 수년 이상 증상으로 고통받아 삶의 질이 급격히 저하되는 일도 흔하다. 환자의 증상이 지속될수록 가족 간 갈등도 심해져 환자는 더욱 고립되고 심한 우울감을 느끼게 된다.

 

그 70대 노인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인지기능의 저하는 없는지 우려가 되어 몇 가지 검사를 해 보았으나 인지기능은 아주 정상이었다. 20년 동안 식사는 어떻게 했는지 물었더니 그럭저럭 잘 드셨다고 했다. 그럼 체한 라면이 안 내려가고 있으면 다른 식사가 소화될 수 있는 지 물었더니, 본인도 말이 안 되는 걸 알지만 계속 체한 느낌 때문에 불편하다고 답했다. 20년간 내시경,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등 안 해 본 검사가 없지만 그 어디서도 이상은 없었다. 소화제와 위장보호제도 꾸준히 먹어보았지만 그때뿐 이지 차도는 없었다고 했다. 아들이 보호자로 같이 내원했는데, 아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같은 소리만 하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냈다. “이거 정신병 맞죠?”라며 나에게 동조를 요구하는 듯했다.

 

보호자를 잠시 대기실에 계시라 하고 환자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2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찬찬히 물어보았다. 환자는 시어머니 병간호를 하며 같이 살고 있었다. 약간의 치매 증상이 있어 여러모로 심신이 고단하던 중 환자에게 잠시 쉴 틈이 났나 보다. 그때 유난히 라면이 먹고 싶어 얼른 끓여 먹고 있던 찰나, 잠에 들었던 시어머니가 깼다. “너 혼자 뭘 또 처먹냐?”라며 호통을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딸꾹질이 나왔다. 먹던 라면은 그대로 놔두고 다시 시어머니 수발을 들기 시작했단다. 그날 호되게 체해서 바늘로 손을 따고 소화제도 먹었다. 그러자 속이 꽤 편해지는 듯했는데 며칠 후부터 먹기만 하면 체한 듯한 불편감이 있더니 그 증상이 간헐적으로 현재까지 지속됐다. 라면을 먹는 시간은 길어봐야 고작 10분이었을 텐데 그마저도 그때의 환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을 거다. 늘 긴장해야 했던 시간이지 않았나 짐작이 됐다. 환자의 말을 들으며 괜히 입술이 부르르 떨렸지만, 마스크 속에 꾹 숨기고 한 마디를 건넸다.

 

“항상 긴장하고 사셨던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참 그렇네요.”

 

환자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그랬나 보다” 하면서 소리 없이 계속 눈물을 보였다. 나는 환자에게 지금의 증상은 그때 놀랐던 당신의 뇌가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긴장하고 있어 마치 체한 것처럼 속이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치료는 뇌를 진정시켜 주는 것이며 긴장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치료기간도 꽤 소요될 수 있음을 말씀드렸다. 환자는 나아질 수만 있다면 기간은 아무 상관이 없다며 나아질 수가 있는 지 재차 물었다. 이처럼 신체화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에게는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증상이 시작될 촉발 요인이 꽤 오래전에 잠재돼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순간을 놓치고 방치해 두면, 말 그대로 뇌가 ‘놀란 상태’로 시스템의 오류를 일으켜 몸에 엉뚱한 증상을 나타나게 한다. 이것이 환자들을 굉장히 불편하게 하고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린다.

 

환자는 그날부터 치료를 시작하고 2주 후에 다시 방문했는데, 이렇게 개운하게 아침을 시작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 치료 시작도 안 한 거니 지금부터 약을 거르지 말고 복용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1년쯤 지나 치료를 종결하는 날, 고생한 환자에게 “졸업하셔야죠”라고 인사를 하려는데 환자는 지금이 새 인생이라며 좋다고 하면서도 나를 계속 보고 싶다며 서운함을 내비쳤다. 내심 뿌듯하고 마음이 벅차 올랐다. 나는 항상 치료 종결을 환자에게 ‘졸업’이라고 말씀드리는데 이 말에는 그간의 치료 과정을 잘 마쳤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제는 건강해 졌으니 다시 보지 말자는 기원의 의미를 같이 담고 있기도 하다. 이제는 그 어머니 환자가 맛있는 라면을 맘 편히 원 없이 드실 수 있기를 기원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조을아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조을아 전문의는 대학교 때 심리학을 전공하며 사람에 대해 파고들었고, 그 길로 의과대학을 거쳐 지금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2022년 서울아산병원에 입사해 수면장애와 정신질환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마주하는 환자들과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보다 건강한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뒤로가기

서울아산병원 뉴스룸

개인정보처리방침 | 뉴스룸 운영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