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전문가 칼럼 내 삶의 터닝포인트 2014.03.11

2013년 10월. 인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김민기 씨는 시종일관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말투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이 그를 더욱 그렇게 보이게 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정말 용감하게 살았다고 자부해요.”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휴대폰 부품회사에 관리직으로 입사한 후 단 3년 만에 대리까지 고속 승진했다. 2년 전, 기존 사업부와 신규 사업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저 없이 신규 사업팀을 선택했고, 이후 신제품의 중국 수출길이 열리면서 더욱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힘들다는 생각 대신 즐겁게 일해 왔죠.” 한 달 뒤면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며 그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제 인생을 변화시켜준 분들께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꼭 들려드리고 싶어요.”
 

 

1990년에서 온 초대장
88 서울 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90년 풍납동. 그곳에 살고 있던 당시 7살이었던 민기 씨는 장난을 좋아하는 또래 여느 남자아이와는 달리 부끄러움 많은 내성적인 아이였다. 유치원에서 놀던 중 짓궂은 친구의 장난에 넘어졌는데 일어날 수 없었다. 심한 통증과 부어오른 다리를 보고 놀라 허겁지겁 찾아간 곳이 바로 서울아산병원(당시 서울중앙병원)이었다. X-ray를 찍어보고 난 후에야 허벅지 근처에 골절과 뿌옇게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하얀 그림자의 정체는 ‘양성 골종양’. 다리뼈에 생긴 양성종양이 뼈를 약화시켜 골절된 것이었다. 그의 주치의는 정형외과 이춘성 교수였다. “아직은 수술을 진행할 단계가 아닙니다. 일단 뼈가 붙을 수 있도록 한 달 정도 부러진 다리를 고정하고 지켜봅시다.” 뼈에 핀을 박고 고정해 매단 뒤 뼈가 어긋나 붙지 않도록 추를 달았다. 그렇게 2달간 고정해 두었지만 뼈가 잘 붙지 않았다. 다시 걷기 위해선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 필요했다.

7살 소년의 인생을 바꾼 그날
“그날 그곳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은 제 인생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90년 9월 8일. 수술을 마치고 올라온 병실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뒤로도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쏟아지던 비는 11일 오전, 결국 마지노선을 넘었다. 위험수위를 넘실대던 한강이 풍납동과 성내동 일대를 순식간에 덮쳤다. 지하 3층부터 지상 1층까지 물에 잠긴 병원도 비 피해를 피해갈 순 없었다. 그날 오후, 외부로부터의 전기공급이 끊겼다. 비상 발전기를 돌리며 버텼지만, 환자들의 상태가 악화되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타 병원으로의 환자이송을 결정했다. 문제는 민기 씨가 있던 정형외과 병동이었다. 몸 곳곳에 부목과 석고붕대를 한 환자들은 멈춰 선 엘리베이터 대신 그들을 고무보트가 있는 1층까지 옮겨줄 구조대를 속수무책 기다려야만 했다. 민기 씨 역시 발목에서 가슴까지 깁스를 한 상태였다. 안절부절못하는 환자 사이에 불안한 기운이 감돌던 그때였다. 땀과 흙으로 뒤범벅된 채 나타난 의료진이 병동에 있던 사람들을 들 것에 올려 하나둘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형외과 병동은 9층. 비상 계단을 오르내리는 작업이 수차례 반복됐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이제 곧 밖으로 나갈 겁니다.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차분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어린 그의 눈에 영웅처럼 보였다. 병원 밖은 물폭탄을 맞은 전쟁터였다. 군인들이 노를 젓는 고무보트 위로 올려진 환자들은 병원 뒤편 올림픽대로에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로 옮겨졌다. 위기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그 날 이후 그는 마음에 ‘포기’라는 두 글자를 지웠다.

용기도 자란다
“제 인생의 롤모델이에요. 제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어준 분이시니까요.”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병동에 머무는 동안 그가 가장 기다리던 시간은 회진시간이었다. ‘오늘은 어떤 말을 해 주실까?’ 이춘성 교수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여러 명의 의료진과 함께 들어와 단호하게 지시하는 그의 목소리는 자다가도 생각 날 정도였다. “요 녀석은 참을성이 강하니까 잘할 거예요.” “앞으로 잘 자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가 건네는 짧은 한마디가 하나둘 쌓여 ‘용기’가 되었다.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에 축구부에 가입했고, 체육부장에 도전하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이제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춘성 교수의 말은 기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운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마음을 울렸다. “이 친구가 지금 이렇게 잘 컸어.”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24년 후 
7살 어린 아이였던 제가 어느새 한 가정의 가장이 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나지막한 아파트 몇 동만 듬성듬성 서 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서울아산병원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드라마 촬영을 온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던 적도 있었죠. 그해 겨울에 병원과 성내역(현 잠실나루) 사이를 잇는 성내천 인도교가 개통되었는데 겨울에 그 길을 지나갈 때면 얼마나 춥던지...“ 24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아직도 생생한 듯 지금의 인생을 살아가게 한 기억부터 아주 사소한 순간까지 추억을 꺼내 놓았다. “의학 드라마를 볼 때면 아픈 부위를 소독해 주시던 20대 후반의 레지던트 선생님이 떠올라요. 늘 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많이 아프냐고 물어봐 주셨거든요. 아파 울다가도 선생님의 미소를 보면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릴 정도로 위로가 됐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진료카드와 그때의 사진을 보여주며 소중했던 그 날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24년이란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어떤 위기의 순간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 손을 내밀고 곁을 내준 믿음직스러운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동행이 있기에 시련도 때론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민기 씨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그는 한 달 뒤,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결혼한다고 했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를 앞두고 지난 24년간 그의 동반자가 되어 준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 연락했다는 민기 씨.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을 더 전해 달라 부탁했다. “교수님! 교수님 덕분에 정말 열심히, 그리고 멋지게 살았습니다. 이제 곧 제게 새로운 동반자가 생깁니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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