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행복을 찾아서 - 선천성 심장병 폰탄수술 후, 이영호 편 2015.05.08

심장은 2심방 2심실 구조입니다. 가운데 칸막이가 심장의 좌우를 가르고, 양쪽은 심방과 심실이 상하를 다시 나눕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심장구조와 달리 선천적으로 2심방 1심실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심실 하나가 없어서 단심실이라고 부릅니다. 말은커녕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가 단심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는 억장이 무너질 텐데, 바로 수술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건강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거든요
몸이 아프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다는 법도 없고요

행복해지고 싶고 꿈이 있고
자신의 삶에 열정이 있다면

분명 몸도 자신의 행복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따라와 줄 것이라 믿어요

어머니께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태어나 얼마 안 돼 감기에 자주 걸렸다고 합니다

병원을 가니 심장이 심실 하나로 기능하는
기능성 단심실이라는 병명을 진단했습니다

기능성 단심실 : 한 개의 심실은 크고 다른 하나는 매우 작아 양심실 교정이 불가능한 심장기형

1988년도에 첫 번째 수술을 하고 검사를 받았는데
폐동맥이 너무 좁아서 검사에 실패하고 말았죠

1차 수술 (1988년) 폐동맥 교약술 : 단심실 환자의 폐동맥을 조여 고혈압을 막아주는 수술

선천성 심장병, 이겨내고 싶어요

그래도 언젠간 나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던 거 같아요

고등학교 시절에도 검사에 실패해서
치료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성인이 되면 또 기회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고

항상 다짐했어요. 언젠간 내 병을 꼭 고칠 수 있다
언젠간 내 병이 꼭 나을 수 있다 라고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병원을 수소문한 끝에 서울아산병원으로 결정하게 됐고요

검사받고 침대에 누워서 나오는데 고재곤 교수님(소아심장과)이
옆에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손톱이랑 입술 파란 건 고쳐줄게
그때까지 제 삶을 통틀어 가장 희망적인 말이었어요

2004년 4월 1일 만우절 날 정말 거짓말같이
수술을 하게 됐어요. 16년 만에

세 번의 수술 긴 터널 끝에 찾아온 희망의 빛

두 번째 단계의 수술을 할 때는
고재곤 교수님(소아심장과)과 충분히 상의하고

2차 수술 (2004년) 상대정맥-폐동맥 연결수술 : 상지를 돌고 온 정맥혈을 폐동맥과 연결

이번이 마지막 수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수술을 진행했어요

수술 내내 영호가 잘 버텨내 줬고
3년 후 폰탄 수술을 받았습니다

3차 수술 (2007년) Fontan(폰탄)수술 : 하지를 돌고 온 정맥혈을 폐동맥과 연결

일단은 영호가 워낙 활달하고 적극적이었고
낫고자 하는 의지도 강했기 때문에

파랗던 손톱이 꽃물을 들인 듯 붉어졌습니다

수술하고 한 달 후에 관악산에 올라가는데
정말 숨차게 뛰어 올라갔던 기억이 나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꼭대기를 밟았거든요

정말 내가 건강해졌구나
이젠 이 병에서 정말 벗어나는구나

포기하지 않아야 알 수 있는 행복이 있습니다

만약 포기했으면 이런 희열을 못 느꼈을 거 같아요

사실 수술 전에는 제게 가정이 생긴다는 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수술을 받고 여자친구가 생기고 또 몇 년 후에는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둘째 아이도 한 달 전에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이렇게 네 식구가 오붓하게 사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기적이자 꿈을 이룬 것이고

제가 하고 싶었던 로봇 만드는 일도 지금 하고 있고요

지금 제 곁에 있는 모든 게 다 제가 이뤄낸 꿈인 것 같습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언제나 당신 곁에 행복은 있습니다

real story 희망을 나눕니다.

오뚝이의 꿈

선천성심장병 '단심실'

심장은 2심방 2심실 구조입니다. 가운데 칸막이가 심장의 좌우를 가르고, 양쪽은 심방과 심실이 상하를 다시 나눕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심장구조와 달리 선천적으로 2심방 1심실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심실 하나가 없어서 단심실이라고 부릅니다. 말은커녕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가 단심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는 억장이 무너질 텐데, 바로 수술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폐동맥이 충분히 자라야 하기 때문에 보통 2살이 지나야 수술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수술 한 번으로 완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7전 8기 오뚝이

1981년 부산, 이영호씨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천성 심장병인 단심실을 진단받았습니다. 영호씨의 부모님은 부산에 있는 병원 문을 빠짐없이 두드렸지만, 야속하게도 치료방법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고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인 이후부터는 아들이 상처받을까 두려워 영호씨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영호씨는 나을 것이란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친구들과 똑같이 생활할 순 없었지만, 비슷해지기 위해 2배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몇 발자국만 걸어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탓에 걸음이 느렸던 그는 친구들보다 1시간 먼저 등교했습니다. 그런 남모를 노력 덕분에 유별나게 마르고, 손끝이 파란 것도 그저 여드름이나 곱슬머리 같은 신체의 특징이라고 믿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불굴의 영호씨에게도 일 년에 한 번,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날이 있었습니다. 바로 개근상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빈손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영호씨는 다짐했습니다. 내년엔 반드시 개근상을 받겠다고.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다음 해 그의 손엔 개근상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7전 8기 오뚝이, 영호씨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수술 받다

영호씨는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절망도 잠시, 아무런 노력 없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혼자 병원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심장병 카페에서 뜻밖의 소식을 알게 됐습니다.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페 사람들은 서울아산병원을 추천했습니다. 서울로 떠나는 전날까지 수술을 완강히 반대하던 어머니는 실패해도 좋으니 수술 한번 받고 싶다는 그의 말에 15만 원을 쥐어 주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막상 병원에 도착하니 불안함이 자꾸 밀려 올라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치료할 수 없다고 하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하지.’ 더 이상 치료의 희망조차 이어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전 병원에선 폐동맥이 가늘어 검사조차 못했던 터라 이런저런 상황을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을 때, 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과 고재곤 교수가 진료실로 들어왔습니다. 그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의외의 말이 들렸습니다. “왜 이제야 왔어요?”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였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손이랑 입술 파란 건 꼭 고쳐줄게요.” 24년을 기다려온 한 마디였습니다. 2004년 4월 1일 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외과 박정준 교수의 집도로 상대정맥을 폐에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수술실에 들어가며 승리의 V(브이)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2007년, 드디어 폰탄수술을 받았습니다. 천천히 눈을 뜨고 바라본 손끝엔 꽃물을 들인 듯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완벽한 사랑, 완벽한 삶

현재 영호씨는 수원의 한 대학에서 로봇을 만드는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결혼 7년 차로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합니다. 둘은 처음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던 영호씨가 수술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동료들과 함께 찾아온 미래의 아내는 그곳에서 처음 영호씨의 병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저런 상황에서도 어쩌면 저렇게 밝을 수가 있을까.’ 부족한 환경을 원망하고 탓하기보다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의 이야기에 그녀는 마음을 뺏겼습니다. “다 가지고 있어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이 사람은 참 예쁜 심장을 가진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마음속에 영호씨의 자리가 커지는 동안, 영호씨는 바투 다가온 사랑 앞에 선뜻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영호씨는 오랜 주저함을 뒤로하고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 그녀에게 청혼했습니다. 평생의 꿈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는 남자, 청혼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두려웠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한번 같이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웠지만, 더 큰 힘이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었습니다. 그건 사랑이었습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 희망의 꽃 피우다

영호씨에게 가족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결국, 가족이 있었기에 견딜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죠.” 그의 부모님은 그가 아프다는 이유로 무조건 감싸는 대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생활하고 경쟁하도록 했습니다. “아프기 때문에 무조건 괜찮다. 괜찮다 할 수도 있겠지만, 잘못했을 땐 회초리를 들고 호되게 혼내셨어요. 그 덕분에 저 역시 다른 친구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었죠.” 오르막길에 오를 수 없는 아들을 업고 산에 오르던 아버지.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가는 아들을 위해 1시간 더 일찍 일어나 아침을 차려주시던 어머니. 그에게 가족은 위로와 힘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수술을 받고 난 후, 그에게는 더 많은 가족이 생겼습니다. “고재곤 교수님은 약을 잘 안 먹었을 땐 무섭게 화를 내세요.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요. 정말 자식 보살피듯이 챙겨주시는 것 같아서.” 서울아산병원 임유미 간호사는 누나처럼 영호씨 집안의 대소사를 잘 챙겨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단심회(서울아산병원에서 폰탄 수술을 받았던 어린이의 가족 모임) 회원들. “단심실 아이를 가진 부모님들은 제가 결혼하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한 것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세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선천성이란 사실만으로 부모는 아픈 아이들 앞에서 작아집니다. 영호씨 자신이 아버지가 된 이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심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여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졸업할 수 있을지, 결혼할 수 있을지 가슴앓이 하는 부모가 있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 다음 목표요? 제 삶에 대한 책을 내고 싶어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 그 동안 받았던 사랑 그리고 어떤 것이 아이들을 정말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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