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희망의 증거 - 성인 간이식 최장기 생존, 이상준편 2014.09.29

1992년 한국경제는 호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상준씨는 유명 전자회사의 CEO였습니다. 스스로 일중독자라고 부를 만큼 회사를 키우는데 미쳐있었습니다. 평소 밤샘하는 날이 많았지만, 타고난 체격이 다부진데다 운동도 좋아하는 편이라 건강에 자신 있었습니다.

 

제가 성인 간이식 최장수
건강하게 살고 있죠 한 번도 이상 없이

1991년 초 몸이 피곤해서 병원에 갔는데 조금 늦게 발견한 거 같아요
간경화 말긴데 1년 내지 1년 6개월 산다고 그래서 충격을 받았죠

아산병원에 장기이식센터가 처음 생긴 해였어요.
이승규 교수님하고 하희선 코디네이터 두 분밖에 없었어요.
어느 날 하희선 코디네이터한테 전화가 왔어요
기증자가 나왔으니 6시까지 들어오라고 일하다가 들어갔죠. 정말 뜻밖이었어요

1992년 10월 8일 날 수술했습니다 두려움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뇌사 기증자가 나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기 때문에

간이식 이후에 인생관이 바뀌었죠
수술 전에는 그때 우리 세대가 가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성취욕에 매몰됐다고 할까요 일중독자였어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수출도 많이 하고

그런데 왜 날 40대에 데려가시나 의문이 많았죠
이승규 선생님이 병실에 오셔서 꿈이 수술하다가
생명 살리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뭘 하다 죽을 것인가

그러다 나보다 40일 먼저 수술하신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 충격을 받았어요
내 앞에 한 사람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게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됐었구나
나 혼자만 사는 게 아니구나 우리처럼 사경을 헤매는 사람한테
한 사람이라도 더 기회를 주자 간이식회 회장이 돼서
의료보험과 장애인 지정하느라 4, 5년간 환우회원과 전력투구했죠

한국의 성인 간이식 환자 중 최장수인데 건강관리 어떻게 하느냐고 많이 묻죠
고마움을 알아야 오래 삽니다
기증자, 가족, 의료진
기증자가 나와서 너무 감격했고요 기도하고 도와준 가족들이 있고
나를 보고 희망을 품는 사람이 생길 거고
고마움을 알면서 세상을 훈훈하게 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real story 희망을 나눕니다.

1992년 한국경제는 호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상준씨는 유명 전자회사의 CEO였습니다. 스스로 일중독자라고 부를 만큼 회사를 키우는데 미쳐있었습니다. 평소 밤샘하는 날이 많았지만, 타고난 체격이 다부진데다 운동도 좋아하는 편이라 건강에 자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족들에게는 간염 백신을 다 맞혔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남 일이라는 듯 무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벽돌 수십 장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 피로감이 엄습했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이라는 40대 초반. 피로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오래됐고, 묵직했습니다. 어쩌면 불평 없이 버텨준 몸이 이제야 신호를 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40대 초반 받은 시한부 선고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르셨다니….” 혀를 차는 의사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배어있었습니다. 병명은 간경화 말기, 1년에서 1년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엔 ‘간경화 말기=죽음’이란 공식이 성립하던 때였습니다. 지금이야 간이식이 보편적인 수술로 자리 잡았지만, 그 시절 간이식은 첨단의학의 결정체였습니다.
이상준씨는 한국전쟁 때 누나를 잃어 망연자실했던 부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장남인 자신을 가르치려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고생만 하신 부모님보다 먼저 가는 건 불효였습니다. 생에 대한 의지가 언 땅을 뚫고 움텄습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살아야하는 이유가 될 때, 생의 의지는 더 간절해지고 강해졌습니다. 부모님, 가족이 삶의 이유가 됐습니다.

서울아산병원으로의 여행

절망이라는 감옥에 갇혔던 이상준씨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군데 문을 두드렸고, 서울아산병원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당시 한국은 간이식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이상준씨는 의료 선진국인 미국행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상준씨가 인생을 걸고 찾은 곳은 서울아산병원. 서울아산병원 이승규 교수팀이 연이어 뇌사자의 간을 성공적으로 이식했다는 희소식과 간이식은 수술 후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관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서울아산병원을 찾게 된 것입니다.

서울아산병원에서의 수술

 

“사무실에 있는데, 오후 5시에 전화가 온 거예요. 기증자가 나타났다고 6시까지 병원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예정에 없던 연락이었습니다. 간을 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뇌사자가 발생했을 때뿐이었습니다. 때마침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고등학생이 나타났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서둘러 이상준씨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습니다.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가슴은 가뭄철 논바닥처럼 마르고, 갈라졌습니다. 하지만 자식 몸이 누군가에게 생명의 물이 된다면, 이보다 숭고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고 힘든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 연락을 받은 이상준씨 가족과 친구들이 병원으로 몰려왔습니다. 간이식란 말조차 들어본 적 없던 친구들은 수술실 문이 닫히면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복도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정작 이상준씨만 평온했습니다. “가족들이 나를 살려달라고 한 기도의 응답으로 봤어요. 평온하고, 감사했습니다.”
무균실 유리창 너머 아들, 딸, 아내가 얼비쳤습니다. 23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에 마취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본 세상은 가족이었습니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제가 겉으론 무덤덤해요. 그때, 아들이 중 3, 딸이 중 1이었는데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으론 아이들이 크는 걸 봐야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

“수술하면 몇 년이나 삽니까?” 간이식 수술을 앞둔 환자들이 묻습니다. “저 보세요, 간 이식받고 22년째 살고 있습니다.” 간이식 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만큼 건강하게 지내는 이상준씨 답입니다. ‘최장기 생존자’이란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이 때론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수술해준 서울아산병원 장기이식센터 이승규 교수팀, 간을 준 뇌사자와 그 가족, 늘 곁에서 지켜준 가족을 생각하면 고마움이 앞섭니다.
한국간이식인협회 회장을 맡아, 회원들과 함께 발품을 팔았습니다. 정부로부터 간이식인의 의료보험 혜택과 장애등급 지정을 이끌어 냈고, 요즘엔 뇌사자 장기기증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침ㆍ저녁으로는 텃밭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이상준 씨

이상준씨의 건강 비결은 평범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의사 선생님 말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1992년 미국행을 포기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 받은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1992년 수술 순간부터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건강한 삶이 이어지도록 도와준 의료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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