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브라보 마이 라이프 - 대장암 3기 완치, 고광억편 2015.08.28

평생 몸담았던 교육계에서 은퇴를 1년여 앞둔 1997년, 고광억씨는 대장암 3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암이 깊이 퍼진데다 항문 근처에 자리 잡아 걱정이 컸습니다. 다행히 대장암 명의인 유창식 서울아산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에게 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이는 64살, 은퇴 후 삶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인생 2막은 고된 항암치료로 시작됐습니다. 속이 메스꺼워 밥 한 톨 넘기기조차 힘들었고, 배에 만든 인공항문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버텼습니다. 수술 후 20여년이 흘렀습니다. 어리광부리던 손주들이 청년으로 성장한 세월입니다. 우리 나이로 여든이 넘었지만, 여전히 아내와 함께 산책하고 손주들과 가벼운 운동을 즐길 만큼 건강합니다. “1990년대 암이라고 하면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환갑이 지나서 암이 발병했지만 그간 병치레 한 번 없이 건강하게 삽니다. 살 수 있다고 믿고, 치료받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의사가 보호자를 부르길래 왜 보호자를 오라고 하느냐? (암입니다) 몇 기입니까? (3기가 이미 지났습니다)
혼자 남겨 두고 갈 수 없는 아내가 있었고 또 자라는 손자들 생각할 때 더 살고 싶다는욕심이 생겼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대장암 완치자 고광억 편
20살에 사범학교를 나와서 45년 동안 쭉 교직 생활을 했는데 퇴직을 앞두고 마음이 부푼 가운데 어느 날 엉덩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니까 암이라고 해서 좀 더 큰 병원을 찾아 서울아산병원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수술받기 전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썼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후손들이 어떻게 살 것이냐 생각할 때 무척 괴로웠습니다
유창식 교수님이 처음 진찰을 하시고
연세가 좀 많으시지만 꼭 사실 수 있도록 해 드릴 테니너무 근심하지 말고 제 말대로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말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과연 마취에서 잘 깨어날 수 있을까 무척 걱정했는데 약 30분 만에 깨어났습니다.
당시 유창식 교수님이 오셔서 수술이 잘 되고 암이란 암은 다 제거했으니 살 수 있다는 말에 희망과 용기를 가졌습니다

처음 수술받고 난 후에는 힘이 없어서 단 100m를 걸어갈 수 없을 정도였어요.
속이 메슥거려서 음식을 잘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백혈구를 얻기 위해서 기를 쓰고 열심히 먹고선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7개월과
3개월간 잘 넘기고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할 때 저와 같이 암 투병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분들도 삶에 용기를 가지고 나는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저와 같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살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주시길 바랍니다.

real story 희망을 나눕니다.

물거품

 

1953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고광억씨는 45년 넘는 세월동안 교육현장에 몸담았습니다. 1997년 퇴직을 겨우 1년여 남겨둔 때,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의 삶에 나침반이 되어줬던 그였지만, 암이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차근차근 그렸던 은퇴 계획은 물거품이 돼버렸습니다. 그날 밤 의사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3기가 지났습니다. 빨리 대학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는 스무 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평생 강원도 교육계에 헌신해왔습니다. 퇴직 후에는 존재 자체만으로 큰 기쁨이었던 어린 손주들과 함께 보낼 기대에 부풀어있었습니다. 한순간에 들이닥친 죽음의 공포는 일상에 균열을 냈고, 그 일상이 제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희망

 

"암이 깊은것 같습니다."

유창식 서울아산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의 말 한마디에 그와 아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곧 이어진 유창식 교수의 말에 마지막 희망을 품었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제가 꼭 사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예순 네 살, 고령인데다 암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을 이미 벗어난 상황이었습니다.

1997년 12월 22일, 성탄절을 사흘 앞두고 온 세상이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찬 그날, 그는 차가운 수술대에 누웠습니다. 눈을 떴을 때 다시 온기를 느낄 수 있길 바라면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아내와 자식들은 초조했습니다. 가족들의 긴장을 누그러뜨려준 건 수술을 마치고 나온 유창식 교수의 따뜻한 말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아직도 유창식 교수의 말을 잊지 못합니다. “수술은 잘 됐습니다. 암이란 암은 다 제거했습니다. 안심하시고, 치료가 끝날 때까지 저를 믿고 따라오시면 사실 수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던 가족에게 유창식 교수의 말은 큰 힘이 되어줬습니다.

 

사랑

항암치료가 시작됐습니다. 평소 고기 없는 식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식욕이 왕성했던 고광억씨는 밥 한술 넘기기도 버거웠습니다. 속이 메슥거려 음식을 토하기 일쑤였습니다. “말로 못할 만큼 힘들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한 달의 반을 서울아산병원에서 항암주사를 맞고, 방사선 치료를 받는 생활이 계속됐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픈 그도, 사랑하는 남편이 허물어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먹는 일만큼 버거웠던 건 인공장루를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암이 항문 가까이 자리 잡은 탓에 항문을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복부 바깥으로 장을 빼내 변을 보게 하는 인공항문, 소위 장루를 만든 것입니다. 그는 인공장루를 처음 봤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항문이 배에 있으니까, 내 눈으로 그걸 직접 봤을 때 무척 괴로웠습니다. 몇 달 동안 언제 어디서 분비물이 나올지 몰라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됐었습니다.”

인공장루를 봐주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매일 장루를 관리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밥을 넘기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손수 생즙을 갈아줬고, 항암치료로 체력이 떨어진 그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암 수술 후 걷는 것조차 벅찼던 그의 몸이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가족이라는 단어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일상

벌써 수술 후 20여년이 흘렀습니다. 걸음마를 뗀 손주가 청년으로 성장한 세월입니다. 손주의 재롱을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날은 기억의 서랍 속에만 남아있습니다. “어리광부리던 손주들이 이제 다 컸습니다. 다들 대학 입학해서 공부하고, 군 복부 중인 손주도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할아버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됐습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 두 살. 하지만 큰 병을 치르면서 더 단단해졌습니다.

여든이 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합니다. 그동안 단 한 번 병치레도 없었습니다. 가끔씩 수술대에 누웠던 그해 겨울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이듬해 겨울을 볼 수 있을지조차 의심했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함께 산책하고, 일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당연한 동시에 여전히 놀랍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1990년대 암에 걸렸다고 하면, 주변에서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당시 저는 환갑이 지나서 암이 발병했지만 지금 여든이 넘도록 건강하게 삽니다. 암 진단을 받으신 환자분들께서는 살 수 있다고 믿고, 의사 선생님의 말을 따라 잘 치료받으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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