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씨 인생에 먹구름이 낀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습니다. 참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졌고 밥을 아무리 먹어도 몸무게가 늘지 않았습니다. 물을 마셔도 갈증이 났습니다. 당뇨를 앓고 있던 고모부는 수경씨의 모습을 보고 무언가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고모부의 손에 이끌려 서울의 대학병원을 찾았습니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무심하게 말했습니다. “당뇨입니다.” 소아당뇨였습니다.
소아당뇨의 경우 초기에 발견해 인슐린으로 혈당 조절만 제때 하면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병원을 다녀온 뒤부터 어머니는 그날 먹은 과자 하나까지 검사했습니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 리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분식집에 가면 밤새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아이스크림이나 크림빵을 먹는 날엔 혈당이 400mg/dL 가까이 올랐습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음식의 유혹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매 순간 소녀 수경씨의 인생 위에는 빨간 경고등이 반짝거렸습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얻은 딸을 바라보는 수경 씨의 마음은 기쁘면서도 또 무거웠습니다.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을 딸은 선천성 심장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에 딸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딸은 건강을 회복하고 무럭무럭 성장했지만, 남편과의 거듭되는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싱글맘이 되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돈을 벌며 딸을 돌봤습니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딸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엄마를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의 웃는 모습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면 수경씨는 딸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든 견뎌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삶이 바쁘고 고단해 건강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당뇨합병증으로 신장까지 망가졌습니다. 신장의 기능이 10%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2009년 1월 병원에서 처음 신장 투석을 권했습니다.
국내 최대 신장췌장이식센터인 서울아산병원을 찾았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3년을 기다렸습니다. 그사이 이식수술이 가능할 수 있으니 대기하라는 연락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기회는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당뇨는 나날이 나빠져만 갔습니다. 저혈당 증상을 보여 콜라를 들이켜면 고혈당 증상이 찾아오는 일이 쳇바퀴처럼 반복됐고, 운전하다 저혈당 쇼크로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응급실에서 눈을 떴을 때 세상에 홀로 남겨질 딸이 가여워 눈물이 났습니다.
수경씨의 인생이 파란불로 바뀐 건 2012년 1월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수경씨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당뇨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딸을 학교에 보내고, 수경씨는 평소보다 많은 인슐린 약물을 꺼냈습니다. 인슐린을 과다 투여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신장이식 코디네이터였습니다. "기증자가 나타났습니다. 빨리 병원으로 와 주세요." 덜덜 떨리는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잠시나마 어리석은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습니다.
수술은 바로 진행됐습니다. 집도의는 국내 최고 췌장과 신장이식 명의인 서울아산병원 일반외과 한덕종 교수였습니다. 신장 한 개와 췌장 한 개가 그녀의 뱃속에 이식됐습니다. 신ㆍ췌장 이식 수술은 다른 장기이식 수술과는 달리 원래 장기를 떼어내지 않아 수경 씨 배 안에는 세 개의 신장과 두 개의 췌장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금방 수술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니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꾸 나약해지는 수경씨에게 용기를 준 것은 서울아산병원 일반외과 한덕종 교수였습니다.
“이식 수술을 받으면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날 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준다는 약속. 5천 건이 넘는 신장이식과 350건의 췌장이식 수술을 집도한 한덕종 교수만이 할 수 있는 약속이었습니다.
‘건강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평범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은 희망이 되었습니다.
수술 후 수경씨는 그 약속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술한 지 한 달이 지나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봤어요. 입술에 빨간 립스틱이 발라져 있더라고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그때 전 빨간 립스틱이 없었거든요. 그때 알았어요. 그게 바로 제 혈색이었다는 걸.” 입술 위로 번진 분홍빛은 이전과는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날 이후 거짓말처럼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몸의 붓기가 빠졌고, 병색 짙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림빵, 단팥빵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28년의 길고 긴 당뇨와의 싸움이 무색하리만치 수경씨의 삶은 180도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첫인상을 통해 그의 살아온 인생을 알아챌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천의 한 보험 출장소에서 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수경씨는 사람 만나는 일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답게 잘 웃는 포근한 인상입니다.
이식수술을 받기 전까지 꿈 많은 열다섯부터 마흔 세 살까지 고통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밝게 커 준 딸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통장에 만원, 이만 원씩 돈을 넣어 준 사람부터 명절이면 현관 앞에 쌀을 두고 간 이웃까지...
수경씨의 기억 속에는 당뇨로 인한 고통의 시간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따뜻함만 남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 경제 형편도 조금씩 나아져 이제는 수경 씨가 동네 조손 가정을 찾아 도와주고 있습니다. 최근엔 서울아산병원 췌장이식환우회 모임도 나가고 있습니다. 췌장 이식 환우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수술 후 식사하는 법과 운동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소중한 장기 덕분에 값지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아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찾아 장기기증 서약도 했습니다.
수경씨는 요즘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 먹고 싶었던 음식과 딸과 함께 가고 싶었던 여행지, 쉰 살이 되기 전 도전해 보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손에 꼽던 수경씨가 15살 소녀처럼 빙그레 미소 지었습니다.
당뇨병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강한 몸이 주는 자유를 느끼며, 오늘도 수경씨는 다시 찾은 청춘의 하루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