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건강 정보 형제는 용감했다 2014.09.16

때론 힘겹지만, 때론 힘이 되는 존재.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한 사랑. 꺾이지 않는 의지와 희망의 원동력. 그 모든 수식어의 주어는 가족이다. 올여름, 103병동에는 뜨거운 가족애를 보여준 한 가족과 그 가족의 사랑을 지켜준 서울아산병원의 이야기가 있었다.

 

 

물러설 곳 없는 가족

 

“아빠, 우리는 열심히 사는데 왜 늘 가난해요?” 시멘트벽으로 사방이 막힌 한 칸짜리 방에 네 식구가 함께 살던 시절이었다. 중학생 아들의 질문에 부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005년. 때늦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갔다. 살기 위한 이민이었다. 빈손으로 간 낯선 나라에서의 삶은 고달팠다. 수산업을 전공한 대졸 출신 이민자 부부는 빌딩 청소, 생선 손질, 마트 계산원으로 밤낮없이 일했다. 오랜 고생이 허무하지만은 않았다. 둘째 아들이 미국의 명문주립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고,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첫째 아들도 대입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들을 향해 성공한 이민자라고 불렀다. ‘조금만 참으면 한숨 돌리겠구나’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즈음, 갑자기 병마가 찾아왔다.

 

하봉관씨가 간경화 말기 판정을 받은 건 2009년 봄이었다. 의사는 길어야 3년이라고 했다. 당장 내일의 생계가 급급한 형편에 치료는 언감생심, 그저 하루하루 ‘기적’에 기대어 살았다. 죽음의 징조가 시시때때로 그와 가족들을 괴롭혔다. 두 아들이 간이식 수술을 권유했지만, 그것만은 못하겠다며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주의를 기울였지만 올해 초, 결국 간암을 진단받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형제는 용감했다

 

둘째 아들 종민 씨는 간이식 수술 두 달 전부터 체중감량을 위해 식사량을 줄였다. 형보다는 체격이 큰 자신이 기증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민 씨의 간기증 소식을 알게 된 담당 교수가 그를 사무실로 불렀다. “한국에 꼭 가야만 하나?”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보며 교수가 다시 말했다. “생체 간이식 수술은 무척 어렵고 위험한 수술이라고 하더군. 종민 군 자신의 인생도 생각하게. 나라면 하지 않겠네.”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그날의 대화는 가족에게 비밀로 남겨두었다.

큰아들 태욱 씨는 술 담배를 끊고 운동을 시작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동생보다 내가 수술받는 게 나을 거야.’ 하지만 태욱 씨에게도 남모를 갈등이 있었다. ‘항공료와 체류비는 어쩌지…’ 사실 태욱 씨에게는 학비로 쓰려고 모아둔 돈이 있었다. 험한 막노동까지 하면서 모은 돈이었다. 하지만 그 돈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민 끝에 돈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학교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는 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이 애써 모아온 것을 한 번에 잃지만,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라고, 잃은 것보다 앞으로 얻을 것이 더 많을 거라는 말로 동생과 어머니를 위로했다.

 

조직 검사 후 아버지의 간이식 기증자로 태욱 씨가 적합 판정을 받았다. 2014년 6월 19일. 간의 70%를 떼어내 아버지에게 이식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수술장을 나오는 형을 기다리고 있던 건 동생이었다. 늘 담담하던 형의 눈가에 번지는 눈물을 보면서 동생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 수술 전날까지 항공료를 구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수술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늦게 오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형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셨더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어요.” 두 아들은 어느새 부모의 마음까지 헤아릴 만큼 성장해 있었다.

 

사랑이 만든 미소

 

수술 2주 뒤, 하봉관 씨의 소장 끝 부분에서 작은 구멍이 발견됐다. 새롭게 나타난 천공에 의료진은 긴급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나왔지만, 가족들에겐 또다시 수술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막막함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때 간이식 퇴원 교육을 받으며 사회복지팀의 진료비 지원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우리 사정을 확인할 수 없으니 믿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갔죠.” 태욱 씨의 어머니가 박형화 복지사 앞에 내민 것은 종민 씨의 성적표였다. 4.0 만점에 3.98이라 적힌 성적표에는 크고 작은 시련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와 현재의 절박함이 담겨있었다. 이후 추가 서류를 검토한 사회복지팀은 원내 불우환자 진료비지원금으로 2차 수술비 전액을 지원했다. 그것은 분명 희망의 빛이었다. 가족의 흔들리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103병동 34호실. 퇴원을 하루 앞두고 오랜만에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수술받고 자기도 많이 아팠을 텐데 태욱이가 병실에 찾아왔더라고요. 미안하고 고마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욱신거린다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수술 전까지 많이 무서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감사해요. 전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거든요.”“모험이었지, 모험.” 형제는 마주 보며 웃었다. 그들의 건강한 기운이 병실 가득 퍼졌다. 앉아있던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몇 주 뒤면 형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몰라요.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한 삶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성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렇게 함께 있기 때문이에요.”

 

절망 끝에 다시 돌아온 곳은 한국이었다. “수술받기 전에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교수님과 면담 후 집으로 가 바로 인터넷을 찾아보았죠. 그때 서울아산병원의 간이식 수술이 세계 최고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곳에서 수술받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고, 한국 사람이란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했어요.” 삶의 무게가 무거울 때면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다시 일어서 나아갈 수 있던 것은 늘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가족 때문이었다. 2014년 여름, 그들에겐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Storytelling Writer 이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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