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건강 정보 남쪽에서 불어온 봄바람 2014.05.09

2009년 여름, 전남 보성군. 그날 김원일 할아버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멀리서 1톤 트럭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몇 분 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가 도로 옆으로 튕겨져나갔다. 구급차가 도착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무릎 위에서 시작된 고통이 온몸으로 퍼졌다.

보성아산병원의 응급실로 옮겨진 할아버지는 무릎뼈 골절을 진단받았다. 사고 소식에 달려온 가족들은 시골에 있는 병원이 실력이 있겠느냐며 광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까지 그곳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했다. “이것보다 더한 병도 고친 병원이여. 내가 다리를 못 쓰면 못 썼지 난 ‘내 병원’에서 수술하련다.”

 

 

보성아산병원을 가다


김원일 할아버지를 처음 알게 된 건 지방 아산병원을 소개한 짧은 영상에서였다. 그중 일부에 할아버지의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짧은 화면이었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할아버지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서울에서 보성까지 왕복하는 고속버스는 하루 한 대뿐이었다. 다행히 보성 터미널에서 병원까지는 30분마다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25인승 셔틀버스 안에 가득히 울리던 트로트 멜로디.

마을을 찾아온 낯선 손님의 등장에 승객들의 화제는 병원이 처음 마을에 들어선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게 원래는 고흥으로 갈 병원이었는디 회장님이 와서 보고는 여기에 병원을 세운 거랴.” “오메? 벌교 아니여?” “그려? 난 둘 다 그건 금시초문인디.” 36년 전 일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역주민에게 보성아산병원은 하나의 상징 같은 병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설립 당시만 해도 보성, 고흥, 장흥 3개 군과 승주군, 강진군, 해남군 일부를 아우르는 지역의 유일한 종합병원으로 그 명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병원은 늘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최신 의료기기를 보기 위해 아픈 곳이 없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 산부인과에서 출산한 첫 번째 아이를 취재하러 서울에서 온 방송팀 이야기도 들렸다. 기억을 추억으로 되새겨야 할 만큼 많은 것이 변했다.

그 사이 목포와 순천을 잇는 국도와 장흥, 고흥 등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지방도가 완성됐고 그 길을 따라 크고 작은 병원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지역 인구가 감소하면서 환자 수도 덩달아 줄어들었다. 설립 당시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 12개였던 진료과는 내과 외과 정형외과 마취과만 남았다. 환자 정원이 100명인 3층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의 평균 연령은 75세 이상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 응급실을 운영하는 곳은 최근에 생긴 벌교 지역 병원과 이곳뿐이다.


16년의 동행   


당뇨 합병증으로 시야가 탁한 김원일 할아버지는 겨우 사물의 형체만 구분했다. 희미한 눈망울 속에 그동안 겪어온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월남 참전 용사였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는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무사히 살아 돌아왔지만 고국에서의 삶도 그리 녹록지 않았다. 변변한 기술이 없어 광주에서 건설 일용직을 하며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꽤 많은 돈이 모였을 때 광주 시내에 식당을 차렸다.

몸에 이상이 생긴 건 그맘때였다. 2년간의 참전이 남긴 상처였다. “사실 내가 고엽제 환자여. 이 고약한 병이 건강할 땐 숨어있다가 건강이 약해지니까 나타나더랑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고, 다리가 저려 걸을 수가 없었다. 광주의 병원에서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을 진단받고 다양한 치료를 받았지만 걷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다. 아픈 동생을 보다 못한 누이가 그를 데리고 보성으로 내려왔다. 문제는 병원이었다. 할아버지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광주 병원까지 갈 수 없었다.

마침 보성아산병원에 국가유공자혜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료를 마친 의사는 평소 다니지 않았던 과로 그를 보냈다. 신경과였다. 검사를 마치고 다발성 신경염을 진단받았다. 먹던 약이 바뀌고 나서야 몸이 점점 좋아졌다. 이후로 할아버지는 16년째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다니고 있다. “이 병원 의료진은 기가 막히게 좋은 양반들이여.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당께.” 병원을 안내해 주던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병원자랑을 들려주었다. “보성에 응급실 있는 병원은 우리 아산병원 하나여. 아산병원이 없으면 큰일 나부러.”

5년 전 교통사고로 이곳 응급실로 옮겨져 정형외과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 무릎뼈에 박아 놓았던 철심이 아직도 남아있다. 병원에서 할아버지의 집까지 거리는 6km 정도. 할아버지가 사는 곳은 보성에서도 외지여서 버스가 2시간에 한 대씩 밖에 없다. 한 대를 놓치면 4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병원 오는 길이 늘 즐겁고 고맙다. “이 병원은 나하고 연이 있는 갑소. 이 병원에서 뭘 하면 다 잘 돼요. 탈이 안나.”


돌아오는 길    


보성아산병원이 지역 최초 종합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보성에 자리한 지 36년이 지났다. 주변 상황이 바뀌고 환자가 줄면 문을 닫거나 돈이 되는 도시로 가기 마련인데 이곳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주민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그것이 할아버지가 보성아산병원을 ‘내 병원’이라 고집한 이유였을 것이다. “주민 대부분이 혼자 사시는 노인분들이에요. 진료가 없는 날에도 집 앞 작은 텃밭에서 가꾼 호박과 죽순 등을 직원 식당에 내어 놓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어르신들 많아요. 다들 가족이죠. 가족.”

병원의 모습은 예전보다 많이 투박해졌지만, 병원은 이제 지역민들과 함께 주름진 얼굴로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병원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 꽃잎이 흩날리는 하늘 위로 가로수는 푸른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늘 푸른 잎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마음에서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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