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건강 정보 당신의 위로 2014.10.20

 

폐렴이나 COPD(만성폐쇄성폐질환), 폐암 환자들이 모여있는 124병동에는 죽음 가까이 갔다가 다시 살아난 환자들이 모여 있는 특별한 병실이 있다. 호흡기 관찰실, 일명 서브 ICU(준중환자실)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곳은 중환자실이라는 깊은 늪을 견뎌내고 올라온 5명의 환자가 일반 병동으로 가기 전에 머무르는 곳이다. 지난여름, 이곳에서 있었던 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때론 환자도 의료진이 된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말, 70대 COPD 환자 두 사람이 며칠 간격으로 호흡기 관찰실에 들어왔다. 중환자실에서 기관절개술을 받고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다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병실 사람들은 출입문 가까이에 있던 환자를 문가 할아버지, 창가 가까이에 있던 환자를 창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문가 할아버지는 2008년 COPD (만성폐쇄성폐질환)를 진단받고 이번이 벌써 5번째 입원이었다. 입원 기간, 문가 할아버지는 병과 멋있게 싸웠다. 간호사가 들어오면 손을 번쩍 들어 반갑게 맞아 주었고, 호흡 재활운동도 열심히 했다. 반면 창가 할아버지는 간호사가 호흡 재활을 권유할 때마다 날 좀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인공 호흡기 제거도 완강하게 거부해 간호사들은 내심 걱정이었다.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 스스로 호흡해야 하는데 너무 불안해하셔서 오늘도 실패했어요.” 낮 근무를 담당했던 봉우리 간호사의 말에 간호사들은 시름에 빠졌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문가 할아버지가 김윤옥 UM을 툭툭 쳤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세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술만 오물거렸지만, 그녀는 할아버지의 입술 모양으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저 앞에 있는 환자 말이야. 도통 움직이지도 않고 저렇게 누워만 있어.’ 할아버지의 손끝은 창가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김윤옥 UM이 간호사들을 불렀다. “우리 이렇게 한번 해 봅시다.”


그날 밤 근무를 담당한 간호사는 오유미 간호사였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그녀는 문가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오유미 간호사와 한참을 이야기하던 문가 할아버지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에 볼펜을 쥐고 머리맡에 놓여있던 I/O 용지 위에 흘러내리듯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폐 질환이라고 무조건 누워있는 것보단 호흡근이 튼튼해질 수 있도록 조금씩 운동을 해 줘야 해요. 힘들면 허리띠를 꼭 매세요. 배에 힘을 기를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호흡 재활을 해야 하고, 기침해야 하는지, 기계 호흡은 왜 떼야 하는지 문가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띄엄띄엄 적어가기 시작했다.

종이를 받아 든 오유미 간호사는 창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다. 창가 할아버지가 눈으로 찬찬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그 앞에 서 있던 오유미 간호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창가 할아버지가 무언가 말할 게 있는 것처럼 입을 오물거렸다. 잽싸게 알아챈 오 간호사가 종이와 연필을 가져다주었다. 손에 펜을 쥐여주자 힘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어렵게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는 대단히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방법대로 해 보겠습니다.’ 간호사들의 치밀한 물밑 작전으로 두 할아버지는 훈훈한 소통을 시작했고, 두 장의 편지를 들고 병실을 나온 오유미 간호사는 124병동 간호사 29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관찰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다음 날 아침, 창가 옆에 놓인 흰 종이를 읽은 간호사들의 입가엔 밝은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기계를 몇 시간 떼어 보겠습니다.’

 

“두 할아버지는 수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작지만 큰 소통을 통해 서로의 투병 생활에 동반자를 얻고 지금도 하루하루 힘을 내서 호흡 재활을 하고 계십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점점 더 좋아지는 두 분을 보면서 간호사로서 환자분들을 일대일로 간호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분들끼리 소통하고 지지할 수 있도록 간호하는 것 역시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 124병동 배혜슬 간호사로부터

 

의료진을 위로하는 것은

 

미얀마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김진희 간호사는 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선배 간호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올해 초 만났던 환자분이 떠올랐어요.” 2011년 입사한 그녀는 3년 차 직장인에게 찾아온다는 ‘직장인 사춘기 증후군’을 살짝 앓고 있었다. “관찰실 근무 날이면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렸어요. 조금도 실수해선 안 된다는 긴장감으로 하루를 보내고, 환자가 조금이라도 안 좋아지면 제가 무언가를 놓쳤던 것은 아니었는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뤘죠.” 팽팽한 실처럼 긴장한 모습의 그녀는 환자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가 담당하던 환자분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셨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드시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니 양갱이라고 하더군요. 이틀 뒤에 양갱을 사 들고 찾아갔는데,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 계셨고, 결국 전해 드리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어요. 그날 오후 바로 돌아가셨죠. 장례식장 가실 때 양갱을 손에 쥐여 드렸어요. 몇 주 후에 환자의 보호자가 찾아와 ‘간호사님이 다녀가신 후 마음 편히 가신 거 같다’고 하시는데, 그 말을 들으니 그간 고생했던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이었어요.”

 

124병동 간호사들은 환자에게 종종 특별한 약속을 한다. ‘휠체어 30분만 타고 오시면 제가 15분간 말동무 해 드릴게요.’ 그러면 환자는 힘을 내 휠체어를 타고 운동을 하러 나간다. 간호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15분 일찍 출근해 환자를 찾아간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의 다리를 주무르고, 가래를 뽑아주고, 욕창이 생긴 부위를 깨끗하게 닦아준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환자의 손을 꼭 잡아준다. 124병동에 전달되는 칭찬카드에는 사연 없이 이름만 삐뚤빼뚤 적혀 있는 카드가 많다. 어르신들이 가슴으로 꾹꾹 눌러쓴 세 글자를 보며 오늘도 의료진은 힘을 얻는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어려움을 이겨 내고, 고단함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낸다. 환자는 그들의 원동력이자 동지이다. 

 

Storytelling Writer 이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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