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건강 정보 오빠의 마지막 선물 2015.07.17

 

1997년 병원에 입사한 박향숙 간호사(간호3팀 투석실)는 인생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지켜봤다. 그런 그녀도 오빠의 시한부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길어야 한 달이라니. 오빠 나이 이제 겨우 마흔여덟. 때론 친구처럼 가까웠고 때론 아빠처럼 든든한 오빠였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빠의 자리   

 

지난해 5월, 오빠가 쓰러졌다. 위에 처음 자리 잡은 암은 의료진이 손 쓸 틈도 없이 온몸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남은 시간은 한 달. 시한부 선고가 내려졌다. 오빠는 홀로 상경해 간호사로 일하는 동생 대신 고향 강원도에서 아픈 언니와 엄마를 돌봤다. ‘향숙이 너는 가족들 걱정하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라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했었다. 오빠는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고 싶어 했다.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떠날 오빠가 가여웠다. 박 간호사는 차마 오빠 얼굴을 쳐다보며 마지막이란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어깨를 떨군 동생에게 오빠는 웃으며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늘 건강하고 씩씩했기에, 여위고 아픈 오빠는 낯설기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 그래도 오빠는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을 버리지 말자. 끝까지 해보자”는 말로 동생을 위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별의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해 사랑했기에 

 

오빠가 입원한 이후 그녀는 그야말로 슈퍼우먼이 되어 살았다. 고향에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오빠를 간호하는 일 모두 박 간호사의 몫이었다. 근무를 마치면 바로 병동으로 올라가 오빠를 간호했다. 아슬아슬한 생활이 계속됐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이 두 사람을 위해 나섰다. 오빠가 밥을 잘 넘기지 못한다는 말에 죽을 들고 찾아온 동료, 어머니와 함께 오빠와 긴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간 동료도 있었다. 간병인이 오기 전 혼자 있는 오빠를 위해 밤 근무를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온 동료, 간병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이브닝 근무를 끝내고 와준 동료, 휴가도 반납한 채 근무를 대신 서 준 동료… 가족이라는 단어로밖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사랑의 힘은 강했다. 온몸에 퍼진 암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심각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래도 오빠는 언제나 밝고 따뜻했다. “어느 날 기도를 열심히 하길래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물으니 옆에 있는 환자가 너무 힘들어하는데 자신이 해줄 것이 기도 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왜 오빠를 위해 기도하지 않느냐고 물어봤어요. 자신은 이미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괜찮다고…”

 

이별하다      

 

8월 말, 오빠의 병세가 악화됐다. 3개월의 투병 생활을 마치고 오빠를 고향 집 근처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겼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는 가족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동생은 오히려 이렇게 함께 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그녀는 오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빠, 다시 태어나도 향숙이 오빠로 태어나줘.” 오빠는 빙그레 웃었다. 몇 시간 뒤, 오빠는 세상을 떠났다.

 

아픈 언니 때문에 다니던 사범대를 그만두고 간호대학을 지원했다. 서울아산병원에 들어왔고, 힘들었지만 간호사라 경험할 수 있는 따뜻한 추억도 많았다. 그런데 오빠와의 짧은 병동 생활은 특별했다. “보호자는 환자를 만나기 위해 밥도 거른 채 먼 곳에서 달려와요. 끼니를 걸러도 배고픈 줄 모르고, 며칠 밤을 새워도 졸리지 않아요. 남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절박하고 소중한지 몰라요. 오빠와 함께 한 하루하루는 환자를 진심으로 안아주는 간호사가 되라는 오빠의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요.”

 

빈자리를 채운 따뜻한 위로     

 

서울아산병원에는 ‘모아 사랑’이란 후원 기금이 있다. 몇천 원부터 몇만 원까지 직원들의 월급 끝전을 모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직원 가족을 돕는 데 사용한다. 모아 사랑이 의미 있는 이유는 또 있다. 거기에는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우리 병원 직원들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도 모아 사랑을 통해 오빠의 검사비 일부를 해결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서 그건 단순한 돈이 아니었어요. 직원분들의 사랑이고, 위로더라고요.”

 

장례식장에서 만난 오빠의 친구를 통해 오빠가 용돈을 모아 박향숙이라는 이름으로 어려운 이웃을 몰래 돕고 있었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박 간호사도 오빠가 가장 좋아할 선물을 하고 싶었다. 오빠의 장례를 치르고 그녀는 대외협력실을 찾았다. 그녀가 건넨 250만 원은 오빠가 떠난 자리를 슬퍼하는 병원 직원들이 보낸 조의금이었다. “동료들의 배려와 도움 덕분에 오빠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어요. 지난 3개월간 병동과 투석실 그리고 병원에서 받은 사랑의 빚을 갚고 싶어요.”

 

동관 로비 한쪽에 자리한 기부자의 벽 위에 ‘박태석’ 이름 석 자가 걸렸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밝게 웃어주던 오빠를 떠올린다. ‘오빠, 잘 지내지? 엄마와 언니도 잘 지내. 우리 가족 항상 지켜봐 줘.’ 

 

Storytelling Writer 이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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