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건강 정보 남매에게 찾아온 ‘특별한 선물’ 2021.09.02

 

사회복지팀에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3월에 동생에게 신장을 이식한 이옥숙(43) 씨였다. ‘우리 곁에 힘이 되어줄 분들이 있구나! 절실히 느끼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라며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비된 청춘

23년 전, 부모님은 삼남매를 두고 각각 집을 나갔다. 부부 싸움으로 조용할 날 없던 집에는 당혹스러운 정적만 남았다. 장녀인 옥숙 씨는 스무 살의 나이로 가장이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뛰며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같은 시기, 고등학생이던 동생 철민 씨는 방황을 시작했다. 축구 선수로 합숙 생활에 들어갔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를 자퇴한 뒤 당구장에 드나들고 카드를 돌려 막다가 누나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다. 하루는 일진 친구들과 노는데 누나와 마주쳤다. “제발 정신 차리고 살자. 응?” 누나는 떨리는 손으로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친구들 앞에서 자존심이 상할 법했지만 철민 씨는 반항하지 않았다. 남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03년 철민 씨가 입대를 앞둔 때였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옥숙 씨는 병원에서 뇌경색으로 한쪽이 마비된 동생과 마주했다. 심한 고혈압으로 이미 장기가 많이 손상되었다고도 했다. 옥숙 씨는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아야 했다. 주변의 추천으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을 진행했다. 출산 직후임에도 아기를 맡기고 나와 동생을 간호했다. 다행히 철민 씨는 한 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 치료가 필요했다. “이 몸으로도 살 수 있어요?” 자신 없어 하는 철민 씨에게 신장내과 이상구 교수는 “마음먹고 하면 되는 거지, 뭐가 어려워요?”라며 되물었다. 따뜻한 위로보다는 따끔한 야단에 가까웠다. 그 순간 철민 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선명해졌다. 당장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일단 너부터

5년 전, 옥숙 씨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남편이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면서 두 딸만 데리고 집을 나왔다.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 철민 씨였다. 뇌경색을 앓은 이후 회사에 다니며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철민아, 오래 신세 안 질게.” “편하게 지내~ 혼자 오래 사니까 시끌벅적한 집이 그리웠어. 가끔 맛있는 밥만 해주라!” 철없을 적 누나에게 진 빚을 갚을 기회였다. 매년 생일 촛불을 함께 끄며 가족의 울타리를 확인하는 기분은 덤이었다. 갑자기 늘은 식구들로 살림은 복잡해졌지만 마음만은 안정을 찾아갔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2020년 가을, 만성신부전을 앓아온 철민 씨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투석과 신장 이식 사이에서 속앓이가 시작됐다. 옥숙 씨는 이식이 필요한 동생의 상황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도움도 청하지 않고 시간만 보낸 동생이 답답했다. “철민아, 당장 병원 가자. 형제니까 신장을 떼어줄 수 있을 거야.” “일이랑 애들은 어쩌려고?” 이식공여자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옥숙 씨가 일을 그만두면 당장의 생활비가 끊기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철민 씨가 말하지 못한 이유였다. 그러나 옥숙 씨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일단 너부터 살려야지.”

 

처음 느낀 보살핌

이식 수술은 해를 넘겨 7월에나 가능했다. 기다리는 철민 씨의 고통은 하루하루 커졌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3월로 수술을 앞당길 수 있는데, 가능하세요?” “그럼요!” 기증자 검사 결과와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식도 무사히 마쳤다.

수술 후 옥숙 씨는 병실에 있으면서 ‘만에 하나 잘못되면…’이라는 불안이 싹텄다. 그때마다 간호사들이 다가왔다. “속이 찌뿌둥하시죠?”라며 등을 두드려주고, “부지런히 걸어야 돼요”라며 함께 병동을 걷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처음 받아보는 보살핌이었다. 철민 씨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검사실에 가자 직원이 대뜸 물었다. “혹시 인턴 선생님과 잘 아는 사이세요?” “아뇨?” “이철민 님의 검사 결과를 자세히 보고 싶다며 의사 선생님이 혼자 오셨더라고요. 이런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이름도 모르는 이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아린 배를 움켜쥐고도 하루 종일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요, 가족이 되어줘서

스무 살이 된 딸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며 걱정 말라고 전화했다. 옥숙 씨는 자신의 스무 살과 겹쳐져 마음이 미어졌다. 회복에 집중할 수 없었다. 사회복지팀 박종란 차장과 면담하면서 한부모 가정 지원 제도를 통한 병원비 할인과 병원의 후원금을 받게 되었다. 그간 의료진의 노력과 병원의 서비스를 떠올리면 염치없게 느껴졌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또 300만 원이 입금되었다. 어리둥절해 사회복지팀에 전화했다. “저한테 돈을 잘못 보내신 것 같아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병원 직원들이 모은 ‘모아사랑 기금’ 대상자로 선정되셨어요. 당분간 몸 추스르면서 생활비로 쓰세요.” 벌컥 눈물이 쏟아졌다. 고맙고 행복한 눈물이니 마음껏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편지에 담았다. “서울아산병원의 도움으로 무거웠던 가장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글재주는 없지만 그 돈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려드리고 싶어요.” 뒤늦게 퇴원한 철민 씨도 인사를 보탰다. “이상구 교수님은 제가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몸 관리를 못 하면 야단치세요. 20년을 함께 보냈으니 가능한 거겠죠. 정년 퇴임하시면 또 그런 분을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강인하게 살아야 했던 남매의 삶은 내내 고단했다. 그런데 서울아산병원이라는 내 편이 생기자 겁날 게 없었다. 남매가 그리워했던 가족의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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