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네, 인턴입니다!] 트리아제(Triage) 2023.11.16

 

 

Triage. 트라이에이지?

“여러분이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트리아제’ 입니다.” 뜨끔했다. 처음 보는 단어를 어설픈 발음으로 읽는 학생을 꿰뚫어 보듯 모니터 너머로 응급의학과 교수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응급실에 시간 약속을 잡고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접수 순서대로 환자를 진료하면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되죠. 따라서 환자 분류는 응급실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가 응급의학과 수업을 들었던 건 코로나19가 퍼지며 비대면 강의에 익숙해지던 때였다. 누구보다 현장에 가까운 응급의학과 수업을 컴퓨터로 듣다니 참 모순적이었다. 클릭 한 번으로 교수님의 설명을 잠시 멈췄다(교수님 죄송합니다). 검색창을 열었다. Triage는 ‘분류하다’는 뜻의 프랑스어 trier 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한다. 
2년 전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Triage 단어의 뜻을 강릉아산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근무하며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첫 근무는 야간근무였다. 병동에서 입었던 초록색 수술복을 벗고 회색 응급실 근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응급실 입구에는 붉은 배경에 흰 글씨가 번쩍였다. ‘권역응급의료센터.’ 그렇게 나는 영동 지역에서 가장 큰 응급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선생님, 입원시켜주세요

“입원을 희망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내가 물었다. “괴사가 시작됐어요!” 보호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괴사라고? 보호자가 가리키는 병변을 빠르게 확인했다. 욕창이었다. 환자는 2개월 전 요양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고 집밥을 맛있게 잘 먹었다. 원래 당뇨가 있던 환자는 집에 온 뒤로 혈당이 전혀 관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악화된 3단계 욕창을 보고 깜짝 놀란 보호자는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에 왔다. 
“어머니를 생각하시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의 상태는 잘 조절되지 않는 당뇨와 부적절한 영양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이고 다른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 상급종합병원 진료가 필요한 상태라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이왕이면 큰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다는 보호자에게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류와 단계의 병원이 있고 각자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점을 설명했다. 환자는 응급실 접수를 취소하고 인근 병원으로 전원했다.
 

우리는 언제 봐 줘요?

“우리 응급으로 왔는데 언제 봐 주나요?” 응급실에 온 모든 환자는 정말로 응급환자이거나 스스로 응급이라고 생각하는 환자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환자의 중증도와 응급도를 따져 부여하는 KTAS(Korean Triage and Acuity Scale)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응급도라면 당연히 접수 순서대로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심정지, 뇌경색 등과 같이 빠른 진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하면 최우선 순위를 부여한다. 허리 통증, 단순 장염 등 심각한 상태로 이행할 가능성이 낮으나 환자의 주관적인 증상이 심한 질환에서는 환자와 보호자가 한껏 날이 서 있다. 이해가 간다. 나였어도 급한 마음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응급실은 고속진료센터가 아니다. 환자에게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급한 동맥혈 채혈을 하러 갔다.

 

우리 아이가 열이 나요

3살 아이가 엉엉 울면서 응급실로 들어왔다. 엄마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이가 열이 나요.” 아이 목을 들여다보았다. 양쪽 편도가 충혈되어 있었다. 호흡음은 깨끗했다. 주간 근무가 야간 근무로 바뀐 첫날이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한데다가 뒤집힌 생활 리듬 때문에 나는 한껏 짜증이 나 있었다. “급성 인두편도염(쉽게 말해 단순 감기)인데 왜 상급종합병원 응급실까지 오신 거죠?” 보호자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소아청소년과 진료가 되는 병원이 없어요.” 아차, 부끄러웠다. 늘 접근 가능한 의료기관으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었다. 밤에 갈 병원이 없는 가족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야간 또는 휴일에 응급실에 방문한 소아 고열 환자는 응급환자에 준하는 증상으로 분류되고 보험이 적용되어 본인부담금이 낮아진다고 한다. 정책적으로도 응급진료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셈이다. 아이를 달래가며 초진을 보고 소아청소년과에 연락했다. 3시간 뒤 열이 잡힌 아이가 퇴실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방긋 웃으며 배꼽 인사를 하는 아이를 보며 나도 웃었다. “안녕, 응급실에서 다시 보지 말자.”

 

참 이상하고도 평범한 응급실에서의 하루였다

살고 싶었던 사람은 죽었고 죽고 싶었던 사람은 살았다. 치료가 필요 없는 사람은 입원시켜 달라고 화를 냈고 중환자실에 가야 할 환자는 집에 보내 달라고 화를 냈다. 누군가는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기쁜 마음으로 가족의 새 구성원을 환영했다. 건강한 사람은 익숙하게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와 수액을 맞고 집에 갔고 아픈 사람은 병을 키워 구급차에 실려 왔다.
나는 하루 동안 서른 번 남짓의 동맥혈 채혈과 비슷한 개수의 코로나 19 검사를 했고 소변줄 여덟 개를 넣었다. 동의서 쉰여섯 장을 구득했고 한 번의 심폐소생술에 참여했다. 훌륭한 선생님들과 열심히 일하면서 진심으로 환자와 보호자를 위로했고, 퇴근한 뒤에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전날과도 비슷하고, 다음날과도 비슷한,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교육수련실
윤성민 인턴

윤성민 인턴은 울산의대 졸업 후 2023년 3월부터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매달 여러 진료과를 경험하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느낍니다.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환자와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의료인이 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2022년 1기 필진으로 활동하며 [의대생의 독서일기]를 연재하였으며, 금년 2기 필진에도 선정되어 초보의사의 성장기 [네, 인턴입니다]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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