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마흔두 살의 오늘 2024.01.12

 

병국 씨는 창원 버스 터미널에서 오후 4시 20분 서울행 버스에 올라탄다. 병원 근처에 도착하니 이미 어둑해진 밤이다. 천근만근인 몸으로 가만히 거리를 서성인다. 여관비를 할인받으려면 밤이 조금 더 무르익어야 하기 때문이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여관방에 짐을 푼 병국 씨는 눈을 감고 내일 오전 진료에서 좋은 소식이 들리길 기도한다. “가난하거나 아프다고 위축되지 않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게 중요한 거죠.” 병국 씨는 7년째 암과 싸우고 있다.

 

서른다섯 살에 찾아온 위기

어느 날 가만있는데도 식은땀이 온몸을 흠뻑 적셨다. 그리곤 이내 쓰러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응급실로 향했다. 위 상부에 출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음 날 더 큰 병원으로 가보았다. 새로 만난 의료진은 위암 말기를 의심했다. 암에 걸릴 만한 나이란 없겠지만 병국 씨는 적어도 서른다섯 살에 닥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심지어 정보를 검색할수록 당황스러운 내용뿐이었다. 위암 말기는 5년 생존율이 2%에 불과했다. ‘내 인생은 끝났구나!’

수술을 앞두고 급히 차를 팔고 일상을 정리했다. 차라리 가족이 없어 홀가분하면서도 혼자서 대처해야 할 상황이 버겁게 느껴졌다. 위 전 절제 수술을 받았고 부신도 제거했다. 수술 후 위암 2기인 것을 확인했다. 병국 씨는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철저한 식단과 운동으로 회복에 힘썼다. 하지만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통증이 찾아오기도 했다. 새어 나온 혈액이 횡격막에 굳으면서 숨 쉴 때마다 죽음을 떠올릴 만큼 아팠다. 암은 전이되었고 항암 치료를 하면 2년쯤 더 살 수 있다고 했다. 병국 씨는 팽팽했던 삶의 긴장감이 맥없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인생이 이렇게 막을 내리기도 하는 거라고. 

 

“다른 병원 한 곳만 더

소식을 들은 고모에게 연락이 왔다. “서울의 큰 병원에도 한 번은 가봐야지.” 부모도 없이 젊은 나이에 암 투병하는 조카가 지레 삶을 포기할까 봐 불안해 하고 있었다. 고모가 예약해 준 서울아산병원에 가서 종양내과 박숙련 교수를 만났다. 박 교수는 그동안의 CT 결과를 찬찬히 보았다. “치료 한번 해봅시다.” 죽음을 앞둔 경고 같은 건 없었다. 이어진 항암 치료 결과도 좋았다. “약이 아주 잘 들었네요. 당분간 관찰만 해볼까요?” 병국 씨는 서울아산병원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또 재발한 것이다. 방사선치료를 병행하면서 치료 효과도 있었지만 안심할 즈음 되자 임파선이 붓고 가슴에 암이 퍼지기 시작했다. 희망과 실망이 자주 반복되면서 모든 게 지긋지긋해졌다. “교수님, 이제는 그만하는 게 맞다 싶어요.” ”무슨 소리예요? 병국 님은 약도 잘 듣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죠.” 혼자만의 의지로는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박 교수의 이야기에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럼 저는 교수님만 믿고 가보겠습니다.”

수술을 받기 위해 흉부외과 김형렬 교수를 만났다. “보통 재발하면 다발성 전이가 돼서 완치가 힘들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당황스러운 질문에 병국 씨는 잠시 머뭇댔다. “방법이 있으면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소심한 목소리로 박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렇죠, 그게 맞죠! 제가 수술 잘해보겠습니다.” 환자의 의지가 전부라는 듯 김 교수는 수술에 최선을 다했고 퇴원까지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병국 씨가 고향의 병원에서 수술받을 때 느낀 불신이나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절박한 순간에 만난 도움

병원에 있으면 할 수 있다 싶다가도 작은방에 혼자 누워 있으면 마음이 약해졌다. 좀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기반을 다져야 할 나이에 투병 생활로 인한 상실감이 방안을 가득 채운 듯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원금을 받으면 일주일에 3만 원 정도만 식비로 쓰고 나머지는 병원비를 위해 모아두었다. 수술이 급히 잡히는 바람에 1인실에 배정됐을 때는 창밖의 한강을 볼 여유도 없었다. 입원비 걱정 때문이었다. 사회복지팀에서 찾아와 병원비 지원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수술 후 퇴원 수속을 밟을 때까지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고, 나보다 더 아픈 환자도 많겠지···.’ 병원비를 정산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사회복지팀에서 전화가 왔다. “병원비 지원이 결정됐습니다. 이미 정산한 건 어서 환불받으세요!” 그 순간 병국 씨에게 서울아산병원의 모든 이가 영웅처럼 보였다. ‘다시 일하게 되면 병원에 꼭 기부해야지.’ 절박한 상황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작은 돈’이란 건 없다는 것. 1억이든 100만 원이든 누군가를 살리는 데 충분했다.

 

더 많은‘오늘’을 만나기 위해

위를 절제한 이후 식도와 소장이 연결되다 보니 밥을 많이 먹으면 소장이 부풀어 오르고 아팠다. 그래서 음식에 간도 하지 않고 철저히 소식했다. 그러나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즐겁게 일상을 지속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라면 반 개를 시작으로 먹고 싶은 것을 먹되 1시간에 걸쳐 잘게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가까운 산에 가서 ‘이것도 다 오르지 못하면 난 죽는다’하고 다부지게 걸어 올랐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체력은 오히려 좋아진 듯했다. 진료실에서 만난 박 교수의 표정도 밝다. “CT에서 암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을 다시 시작해도 되겠는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힘들 때마다 교수님이 잡아주신 덕분에 제가 살아있는 겁니다!”  

병국 씨는 위암을 발견하고 6번의 전이를 거쳐 7년째 살고 있다. 7번째 전이가 언제든 올 수 있다. 하지만 2년만 살 수 있다던 인생이 5년이나 연장되었다. 서울아산병원에 온 까닭에, 병국 씨는 무사히 마흔두 살의 오늘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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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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