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네, 인턴입니다!] 그럼에도 소중하고 간절한 오늘 2024.02.07

 

“어휴, 지겨워”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감히 이런 생각을 하다니?

매일 같은 검사, 처치, 동의서, 수술 준비. 검사, 처치, 동의서, 그리고 수술 준비. 반복되는 날들에 지쳤는지, 작년 이맘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적잖게 놀랐다.

 

입사 초반, 동맥혈 채혈과 같은 간단한 술기조차 해내지 못해 상심해 있던 나에게, 한 교수님께서 해 주신 농담이 있다. “지금은 동맥을 짚는 것도 어렵지. 하지만 9월이 되면 던진 주사기에도 동맥혈이 맺힐 거고, 12월이 되면 손가락 사이사이에 주사기를 끼우고 환자 네 분의 동맥혈을 한꺼번에 채혈할 수 있어. 그리고 내년 2월쯤 되면 동맥을 짚어 보면 산소포화도를 알 수 있을 거다.”

당연히 농담일 뿐이지만, 실제로 당시엔 술기 하나에도 벌벌 떨었던 인턴들은 수료를 코앞에 둔 지금 못 하는 일이 없다. 한 손에는 동맥혈 주사기, 한 손에는 심전도 전극을 휘어잡고 병실로 뛰어들어가서는, 병실에서 걸어 나오며 L-tube(비위관)와 도뇨관을 삽입하고 CT 동의서까지 구득한다(약간의 극적 과장이 섞여 있다).

 

앞서 [인턴은 무슨 일을 할까?]에서 다룬 바 있는 인턴 업무, 소위 ‘인턴잡’들은 인턴의 근무 형태상 1개월 내외의 짧은 훈련에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어야 하므로 난이도나 위험성이 다른 업무에 비해 크게 높지 않다. 1월의 인턴 의사들은 11개월의 인턴 생활을 거치며 대부분의 분과를 이미 경험했거나, 처음 경험하는 분과더라도 큰 변화가 없는 업무를 요구받아 새로 배워야 하는 일이 많지 않다. 업무의 위험성이 높지 않다는 말은 곧 환자분의 상태에 극적인 영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반복적이고 지난하게 느껴지는 검사와 처치의 단계 하나하나가 결국 치유에 이르기 위한 길이겠지만, 필자가 받은 인상은 그랬다.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은 오늘. 그렇게 생각하며 보내던 하루하루가 나에게 지겨움의 씨앗을 심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때 꿈이었던 날들은 지루한 일상이 되어 버렸고, 고마움을 잊은 하루하루는 즐겁지 않았다. 어쩌다 일이 많은 날에는 짜증이 났지만, 여유로운 날은 당연한 듯 넘어갔다. 친절한 말에 감사하는 마음은 금방 사라졌고, 누군가의 날 선 말에는 하루 종일 꽁해 있었다. 시쳇말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으며’ 오히려 누군가에게 기분 나쁜 하루를 안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논어 위정편에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구절이 있다.

공자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며 남긴 말로, 나이 예순이 되자 귀에 거슬리는 말이 없었고, 일흔둘이 되자 마음이 가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1년의 인턴 수련을 사람의 삶에 비하면 1월이 된 지금은 예순과 일흔 남짓인데, 아직도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하고 일의 흐름이 막히는 것을 보면 나는 한참 멀었다. 이러다가는 이순과 종심의 경지에 이르기는 커녕 귀를 막고 제멋대로 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초심을 잃은 나를 일깨워준 일이 있었다. 약간은 기계적으로 검사의 내용을 설명하고 동의서를 구득하던 중, 한 환자가 몇 번의 질문 후에 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본 선생님들 중에 가장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어요.” 나는 부끄러웠다. 누군가를 흉보려 하신 말씀은 아니었고, 나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분의 말에서는 미지의 치료 과정에 대한 두려움, 소중한 건강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여러 번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의학 용어에 대한 난해함, 오늘 처음 만난 초보 의사에 대한 고마움이 섞여 들렸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주 중요했을 그 순간의 무게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환자의 질문을 몇 개 더 받고, 더 궁금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다시 물어봐도 된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좋은 의사가 되고 싶은 나의 마음이 아무리 큰 들, 건강히 집에 가고 싶은 그분의 마음보다 클까. 환자의 힘듦에 내가 끌려갈 필요는 없지만, 환자가 느낄 걱정과 건강해지고 싶은 간절함, 그리고 일상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을 만든 어제도, 오늘이 만들 내일도 소중하듯, 오늘도 소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자리에서 일하고 싶었던 나의 간절함과 건강을 되찾고 싶은 환자의 간절함을 잊지 말고, 오늘도 힘을 내서 출근해야겠다.

 

교육수련실
윤성민 인턴

윤성민 인턴은 울산의대 졸업 후 2023년 3월부터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매달 여러 진료과를 경험하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느낍니다.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환자와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의료인이 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2022년 1기 필진으로 활동하며 [의대생의 독서일기]를 연재하였으며, 금년 2기 필진에도 선정되어 초보의사의 성장기 [네, 인턴입니다]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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