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병원 게시판에 ‘2024년 신년 글자판 이벤트’ 글이 올라왔다.
‘나의 환자안전 키워드 찾기 글자판’을 보는 순간 마치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했던 ‘월리를 찾아라’가 떠올라 호기심이 생겼다. 올해 나를 이끌어 줄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마치 포천 쿠키를 열어보는 듯한 기분으로 진지하게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센 후 글자판을 쳐다본 순간, ‘규정 준수, 환자 안전, 전인 간호’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암 환자와 동행하는 간호사의 마지막 주제인 Safety와 Total Quality를 어떤 내용으로 담아낼까 고민하던 중 이 키워드는 내게 의미 있는 단어로 느껴졌다.
암병원 종양내과 외래 간호팀에게 Safety(안전)은 처방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AGS(Asan Global Standard: 서울아산병원이 만든 세계적 수준의 의료 기관 표준)를 준수함으로써 환자에게 안전한 진료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항암 교육 담당 전문간호사들은 환자가 주체적으로 치료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진단 받은 암에 대한 정보, 주치의와 함께 결정하는 치료 방법, 계획과 치료 진행 중 발생할 수 있는 문제, 부작용, 주의 사항이 무엇인지를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줘야 한다. 의료 정보 관련 이해력이 높아진다면 인터넷에 떠도는 거짓 정보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치료 과정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의료기관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유물론적 지식만을 가지고 환자를 진료한다는 것은 막힌 배관 파이프를 뚫어주는 배관공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서울대 의대 정현채 교수님의 글을 기억한다. 환자는 병원에서 경험하는 모든 치료와 회복 과정에서 한 인격체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Total quality(최고 수준의 질적 의료 서비스)를 유지하는 기둥에는 ‘전인 간호’가 있다.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판단해야 하는 중심에 환자가 있고 질병 외에 정서적, 사회적, 영적인 부분까지 살펴야 하는 간호사가 있다.
전문간호사의 상담은 환자에게 일방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진료실에서 못다 한 이야기, 치료를 결정하면서 겪었던 갈등, 치료 후 부작용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경제적인 문제,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등을 들으며 이해하고 공감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경청과 따뜻한 위로가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어준다.
‘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의 저자인 버나드 라운은 40년 동안 의료인으로 살면서 늘 마이모니데스의 기도문 “환자가 고통받는 나의 친구임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고 내가 그에게서 질병만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도록 하소서.”의 기도문을 항상 기억했다고 한다. 나는 종양내과의 모든 간호사들이 이런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항암치료와 수술을 잘 마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다시 약물 치료를 시작하는 유방암 환자를 만났다. 환자는 “치료 과정은 힘들었지만 잘 극복하고 있고 평생을 공들여 일군 사업도 병행하고 있어요. 치료 시작할 때 용기 낼 수 있도록 상담해 줘서 고마웠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격려하는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아마도 치료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잘 지켜낸 환자에게 오히려 정말 감사했고 그 삶 속 일부에 내가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암 치료 과정은 환자 혼자가 아닌 여러 의료진이 동행하는 길이다. 환자와 의료진 모두가 평범하지만 자신만의 행복한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길 바라며 암환자와 동행하는 간호사 이야기를 마친다.
종양내과 외래
강은희 차장
2011년부터 유방암, 림프종, 다발골수종 환자의 항암 교육과 상담을 담당하고 있는 종양전문간호사입니다.
암교육정보센터에서 암 피로관리 강좌를 맡고 있으며 환자와 의료진의 의사소통과 건강한 치료적 관계 만들기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신뢰를 쌓아가는 외래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