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아(9)는 어느 날부턴가 이유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 이미 앓고 있던 터너증후군과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답답함만 더했다. 1년을 그렇게 보내고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의사는 큰 수술을 감당하기엔 아직 어리니 기다려보자고 했다. “진단을 받고 너무 놀라 설아에게 물어봤죠. 그동안 태권도장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숨차고 힘들었을 텐데 왜 엄마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냐고요. 다들 이렇게 힘든 건 줄 알았대요. 아직 아픈 게 뭔지 모르는 어린아이였어요.”‘이게 최선의 치료일까?’라고 자문할수록 설아의 부모는 자신이 없어졌다. 2022년 서울아산병원에 오게 된 이유였다.
낯선 질병이 계속됐지만
소아심장외과 박천수 교수는 설아를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했다. 대동맥 뿌리가 많이 늘어나고 대동맥 판막과 승모판 폐쇄부전을 앓는 상태였다. 심장 수술을 서두르려 했지만 반복되는 고열의 원인을 찾기 어렵고 조절도 쉽지 않아 난감했다. 12월에 예정된 수술이 세 번이나 미뤄지면서 설아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유치원 졸업식과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작은 체구에 말수가 많지 않은, 연약한 소녀인 듯 보이지만 반복된 입원과 검사에도 투정 한번 없이 잘 헤쳐 나가던 친구예요.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되고 힘들까 안쓰러웠습니다.”
겨우 열이 잦아드는 시점을 찾아 대동맥판막과 대동맥을 통째로 교환하고 승모판막성형술을 진행했다. 수술하는 8시간 동안 부모는 이 고비만 잘 넘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수술실에선 복부부터 다리까지 이어지는 혈관내막의 염증을 발견했다. 조직을 채취해 진단에 필요한 검사들을 해본 결과 ‘타카야수 혈관염’이었다. 이제는 혈관외과 치료가 필요했다.
큰 산을 넘어볼 용기
어느 날 병실로 혈관외과 권준교 교수가 찾아왔다. 초진도 보기 전, 의사가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에 설아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권 교수는 검사 결과를 먼저 확인해 봤더니 수술이 시급하다면서 설아의 자가면역질환과 앞으로 치료할 내용을 설명한 뒤 수술 일정을 빠르게 잡았다. “남편과 아무리 공부해도 설아의 질병들은 하나같이 어렵고 낯설었어요. 그래서 질문이 많아지면 이전 병원에선 귀찮아 하거나 기다리라는 반응을 보였어요. 그때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겐 병원 생활이 참 어렵구나…’라며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죠. 그런데 서울아산병원은 항상 친절한 데다 다음 치료를 먼저 챙겨주셨어요. 모두가 설아를 돕고 있으니 어떤 문제가 와도 이겨낼 수 있다는 기분이 들도록요.” 어린이병원 앞을 지날 때면 전광판에 흐르는 환자들의 사연을 한참 서서 보았다. 서울아산병원을 만난 게 행운이라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우리도 그런데!”라며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심장 수술이 마지막이라고 했던 이야기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수술이 얼마나 무섭고 아픈지 알고 있는 설아는 수술 직전까지 눈물을 흘렸다. 권 교수는 평소 설아의 애착 인형이 코끼리인 것을 기억해내곤 “수술 잘 받으면 코끼리 인형을 선물해 줄게!”라며 달랬다. 권 교수의 약속에 설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복부 대동맥류 인조 혈관 치환 수술 후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로 왔을 때 새 코끼리 인형이 설아를 반겼다. 수술 자국을 감싸듯 코끼리 인형을 안고서 설아는 권 교수의 회진을 매일 기다렸다.
설아의 속도대로
지난해 4월 중순, 설아는 심장 수술 후 처음 등교했다. 이미 학기가 시작되어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 긴장됐다. 아직 수술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엄마, 나 오늘 달리기 꼴찌 했어!” “우리 달리기 연습 좀 하자. 꼴찌 하면 속상하잖아~” “왜? 난 괜찮은데?” 설아는 자신만의 속도를 씩씩하게 찾아 나갔다. 다만 병원 진료와 현장학습이 겹쳤을 때만큼은 설아도 여덟 살 아이였다. 처음으로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꺼냈다. 여러 과 진료를 하루에 힘들게 맞춘 데다 진료가 미뤄지면 당장 먹어야 할 약이 모자랐다. 부모의 단호한 반응에 설아는 대신 주말에 가족끼리 같은 곳으로 소풍 간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부모가 안쓰러운 마음을 숨기듯 설아는 속상한 마음을 숨겼다. “엄마가 설아를 아프게 낳아서 정말 미안해.” “왜? 내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가 잘못한 거잖아.” 나란히 누운 잠자리에서 설아의 대답에 엄마는 소리 없이 울었다. 터너증후군을 처음 진단받고 일주일 내내 울었던 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매일 호르몬 주사를 놓으며 미안해질 때, 작은 몸에 커다란 수술 자국이 남은 걸 보며 마음이 미어지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자가면역질환 때문에 앞으로 조혈모세포 이식도 받아야 했다. ‘설아는 이렇게 씩씩한데 엄마가 약해지면 안되지.’ 마음을 다잡으며 잠을 청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설아의 판막 장치 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
의료진에게서 발견하는 희망
8월 23일 외래 날, 요즘 열이 계속 난다는 이야기에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김혜리 교수는 당분간 입원해서 지켜보자고 했다. 입원 이야기에 조금 긴장했던 설아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그동안 치료해 준 여러 진료과 의료진이 응원 차 한데 모인 것이다. 설아 어머니에게도 큰 위로였다. “어려운 숙제가 계속되지만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어 감사해요. 서울아산병원에는 수많은 설아가 있을 텐데 아이들은 의료진의 눈빛, 말 한마디에서 희망을 먼저 알아채요.” 설아는 병동 소원나무에도 설레는 희망을 적었다. ‘나같이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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