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은후에게 찾아온 ‘운’ 2024.11.19

 

 

“2018년 같은 병실에 99년생 동갑인 친구 둘이 있었어요. 그중에 저만 살아남았어요. 첫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땐 무서워서 종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어요. 또 한 명은 그 가족이 택시에 짐을 싣는 걸 외래 가는 길에 보면서 알게 됐어요. 하늘나라로 보내고 가는 길이라고….” 급성림프모구백혈병을 앓아 온 은후 역시 2번의 재발을 겪으며 삶의 의욕이 바닥난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저는 정말이지, 운이 좋은 환자였어요.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은 운이 따라왔다니까요!”  

 


아직은 견딜 만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몸이 붓고 잠이 많아졌다. 딱히 아픈 곳은 없어 키가 크려나 보다 여겼다. 그런데 수영장에서 딸의 복부가 비정상적으로 부은 걸 본 엄마는 놀라 병원으로 은후를 데려갔다. 백혈병이었다. 급히 서울의 치료 잘하는 병원을 수소문해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고경남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급성림프모구백혈병이라는데 약물 치료로 순조롭게 회복됐어요. 학교도 다니고 특별히 아프진 않아서 가끔 어른들이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면 ‘그렇게 큰 병인가?’하는 정도였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완치됐다고 마음을 놓은 순간에 문제는 찾아왔다. 


혈액검사 결과가 이상했다. 완치 후 재발은 병원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라고 했다. 관해 성공 여부에 따라 이식을 결정하기로 했다. 스테로이드의 영향과 항암제 부작용으로 힘든 입원 생활이 이어졌다. “스무 살 친구들이 누리는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어요. 그때마다 레지던트, 간호사 선생님들이 친구가 되어 줬어요. 연령대가 비슷해 통하는 점도 많고 선물도 주고받았죠. 무엇보다 밤낮으로 저를 위해 고생해 준다는 걸 알 수 있었고요. 최유리 쌤, 서유리 쌤, 최진희 쌤, 김나연 쌤, 정은선 쌤, 최은석 쌤 그리고 또…” 은후는 인생의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면 단연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라고 했다. 치료 결과도 좋아서 이식 없이 퇴원할 수 있었다. 

 

 

운명처럼 찾아온 CAR-T 치료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도 생길 때쯤 감기가 심하게 걸렸다. 기침을 하다가 피가 쏟아졌다. 하루 종일 머리가 어지럽고 먹는 것마다 토했다. 눈도 부어올랐다. 또 재발했다는 이야기에 이젠 치료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땐 솔직히 ‘될 대로 돼라!’라는 마음이었어요.”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김혜리 부교수가 CAR-T 치료 이야기를 꺼냈다. 제일 처음 뿌리 내린 암세포가 워낙 질겨 계속 재발하는 것 같다면서 이제는 기술이 발달해 암세포를 추적할 수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했다. CAR-T 치료는 재발성 또는 난치성 급성림프모구백혈병 환자에게 효과적인 치료로, 거대세포증후군과 급성림프모구백혈병 환자에 한해 25세 이하여야 가능하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제가 딱 24살일 때였어요. 정보를 찾아보니 국내에 적용한 환자가 별로 없고 받고 싶어도 못 받는 환자가 많았어요. ‘조금만 늦었다면? 내가 서울아산병원에 다니지 않았다면?’ 생각할수록 운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더라고요. 가장 처음 치료받은 미국인 환자가 잘 지내는 영상을 찾게 되면서 몇 번이나 돌려봤어요. ‘나도 그 애처럼 건강해져야지!’라는 생각만 했어요.”  

 

 

잘살아 보고 싶은 마음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치료 일정이 열흘 미뤄지긴 했지만 CAR-T 치료는 수월하게 끝났다. 그런데 차츰 열이 나고 혈압이 떨어지면서 온몸이 붉게 올라왔다. 3일째 되던 날 중환자실로 가게 됐다. “저도 제 상태를 정확히 몰라서 ‘금방 올라올게요’라고 웃으며 인사했는데 그때 간호사분들이 ‘박은후 독하다~’라고들 생각했대요. 지방에 있는 부모님께 병원에 와보셔야겠다는 연락을 할 정도의 상황이었다더라고요.”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꿈을 꿨다. 누군가에게 쫓기며 겁을 먹었다. “막 잡히려는 찰나에 어떤 할머니가 제 앞에 나타났어요. 저를 구해주면서 ‘너는 지금 올 때가 아니니 앞으로 네 힘으로 살아내라’더라고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죠.” 회복 후 병실에 다시 올라오자마자 은후는 아빠에게 전화했다. 다 나으면 백혈병어린이재단과 서울아산병원에 1억씩 기부하겠다고. 꼭 나을 것만 같았고, 누구보다 잘살아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솔직하게, 긍정적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지난해 8월 조혈모세포이식을 받았다. 이제 암세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김 교수의 진단에 은후는 밝게 웃었다. 그리고 1년. 지금의 일상이 믿기지 않는다고 엄마와 자주 이야기한다. 치료 중에 폐렴과 대상포진, 골괴사 등 크고 작은 아픔이 많았지만 특히 생리가 멈추고 신경이 마비되어 손발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두려움이 앞섰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엄마는 “하나도 부러워할 것 없어. 몸의 기능이 돌아오든 말든 일단 살고 보는 거야”라며 걷는 연습부터 시켰다. 누구보다 교육열이 높던 엄마는 어느새 딸의 건강만 바라고 있었다. 은후도 오늘의 병원 식사는 무엇일지 궁금해하면서 순간의 행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완벽하지 않은 날도 운이 가장 좋은 날처럼 여겨졌다. 


스물다섯 살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요즘, 은후는 한동안 야구에 꽂혀 지내기도 하고 명상과 독서 챌린지를 하며 마음 건강도 챙겼다. 제빵 기술을 배워 관련 일을 해보겠다는 포부도 들려주었다. “언젠가 병실에 새로 들어온 환아가 계속 울기만 했어요. 진단받은 지 일주일도 안 됐을 때라 많이 막막했을 거예요. 환아 어머니가 계속 울지 말라고 다그치길래 제가 그냥 놔두시라고 부탁드렸어요. ‘하루하루는 내 감정에 솔직하게, 인생은 긍정적으로!’라는 마음으로 투병생활을 하니까 운도 찾아온 것 같거든요. 울 때 울더라도 희망만 놓지 않으면 되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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