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뭐라고 하는 거지?’ 귀는 잘 들리지 않고, 영어는 낯선 의료 용어들의 연속이었다.
‘백혈병’이란 말을 알아들었다 해도 믿을 수 없었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오면서 그린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갑자기 숨이 차기 시작해 눈까지 보이지 않자 급히 귀국해야 했다. 가족들은 터널 끝의 빛만 보고 가자며 달랬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조혈모세포이식을 시작으로 폐이식까지 이어지게 될 줄은.
스물여섯 가을. 이은(38, 가명)의 인생은 장르가 바뀌고 있었다.
‘선감사 후결재’ 시스템을 아시나요?
조혈모세포이식을 받았지만 이식편대숙주 반응으로 장, 간, 눈, 폐 곳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순식간에 20kg 이상 빠졌고 간 수치는 끝없이 올랐다. 긴 터널에 갇혀 하루하루 삶과 죽음을 더듬거리는 기분이었다. 폐에 생긴 염증으로 이산화탄소를 원활히 배출하지 못해 폐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 2년 동안 약과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지냈다. 숨이 차 늘 2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깼고, 병원 오는 길에 자동차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숨을 헐떡거렸다. 이쯤 되니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먹고 차에 타는 것만 봐도 박탈감이 느껴졌다. 매일 누워지내면서 TV를 켜지 않은 이유였다. ‘내가 그때 캐나다에 가지 않았다면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매일 원인을 따져 물었다. 인생을 거슬러 오르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나서야 답 없는 질문은 멈춰 섰다.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기진맥진했다. ‘그래, 오늘부턴 감사한 것을 세 가지씩 써보자!’
문제는 감사할 게 도통 없다는 점이었다. 감사의 침묵이 흘렀다. “오늘 볶음밥 해줄까?” 엄마의 질문에 순간 입맛이 돌았다. “응!”하는 대답에는 감사가 스며 있었다. “드라이브나 갈까?” 친구의 제안도 새삼 고마웠다. 자신을 차에 태운다는 건 휠체어와 각종 장비를 싣고 자신을 안아 올리고 내리는 과정을 이미 각오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의료진의 숨은 선의도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굵은 펜으로 끄적인 한 줄마다 감사한 마음은 크게 번져나갔다. 정 쓸 게 없는 날에는 ‘내일은 호흡이 더 편해질 것 감사’ ‘내일 날씨가 더 좋아질 것 감사’라며 감사를 미리 끌어다 쓰고는 내일의 결재를 기다렸다. 자다가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몸이 아파 눈을 번쩍 뜰 때도 ‘삶을 이어갈 힘만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라며 감사를 기억했다. 100일간의 감사 습관은 생각과 언어를 모두 바꿔놓았다.
소속감이라는 응원
2018년 더 이상 폐이식을 미룰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백혈병으로 폐가 안 좋아진 환자들의 이식 성적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해보자는 의료진의 각오가 느껴졌다. 에크모를 적용하고 기증자를 기다리면서 내심 ‘수술이 잘못돼 치료비도, 누군가 받을 수 있는 폐도 낭비하게 된다면 이쯤에서 끝내고 싶어요’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건강한 폐를 기증받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술 과정에선 지혈이 잘 되지 않고 골다공증으로 약해진 뼈가 주저앉는 등 많은 위험이 따랐다. 가족들은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의료진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무사히 눈을 떴다.
중환자실에선 고립감과 함께 매순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손가락과 발가락, 얼굴 외엔 움직일 수 없었다. 물을 마실 수도, 베개를 고칠 수도, 물건을 집을 수도 없었다. 백내장이 진행된 눈은 결막염과 안구건조증으로 시력이 떨어지고 각막이 긁히면서 내내 아팠다. 눈이 부셔 창밖의 가을도 볼 수 없었다. 못내 아쉬워하자, 한 간호사가 곱게 말린 단풍잎을 선물했다. 시계가 잘 안 보인다는 이야기에 “잘 보이는 걸로 사다 줄까요?” 대뜸 묻는 간호사도 있었다. 한 간호사는 해외여행을 다녀오며 현지 간식을 챙겨왔다. ‘왜 나를 챙기지?’ 매번 의아했다. 그러면서도 휴게 시간마다 나에게 다가오는 간호사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세상 어딘가에 발을 붙이고 사는 기분을 느꼈다. 오랜 병상 생활로 잊고 지낸 또래들 속의 소속감에 가까웠다. 그렇게 보낸 중환자실에서의 7개월이 아프지만은 않았다.
무료할 때마다 의료진의 이름과 특징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각 캐릭터가 살아 있다며 그림을 본 사람마다 재미있어했다. 그림 20여 점을 모아 중환자실 복도에 전시회도 열었다. 그림 옆에는 많은 사탕과 초콜릿, 꽃이 걸렸다고 했다. 내가 그린 그림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돌려주고 싶은 꿈이 생겼다. 몸에 자주 쥐가 나고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아 펜조차 무거운 날이 많았지만 그래도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내가 숨차게 뛰어가는 곳은
점차 호흡이 좋아지고 혼자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을 찾았다. 사회에서 불러주는 곳은 없지만 ‘내가 날 고용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캐릭터 문구를 만들어 판매했다. 초보 판매자로서 계속되는 시행착오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조금씩 볼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9개의 진료과를 돌며 12년째 쉼 없는 치료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폐렴으로 신장이 나빠지면서 투석을 시작했다. 격일로 투석을 받고 돌아오면 하루는 온전히 쉬어야 한다. 그래도 투석 전에는 제한됐던 귤을 이제는 하루에 하나씩 먹을 수 있다. 가장 목마를 때까지 아껴둔 귤을 입에 넣는 순간이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중환자실에서 사귄 동갑내기 간호사가 그랬다. “이은 님은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건지 알게 됐어요.” 사람은 예외없이 죽음을 향해가지만 나는 삶을 향해 숨이 차도록 달렸다. 그래서 지나가는 하루의 상실보다 다가오는 하루의 기쁨을 수백, 수천 번도 더 경험했다. 나는 이런 나의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