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우리들의 작전 타임 - 혈관종 희귀병 호빈이 이야기 2025.05.16

“우리 아이는 어떡하라고, 또···.” 

 

호빈이 엄마는 전화 한 통에 풀썩 주저앉았다. 소아청소년전문과 이범희 교수의 전화였다.

추가 자료를 덧붙여 낸 3번째 신약 신청서 역시 반려됐다는 것이다.

선천성 희귀병으로 혈관이 증식하면서 다리가 퉁퉁 붓고 온몸에 내부 출혈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치료할 신약이 2세 미만 환아에게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고통을 안고 사는 아이에게 신약을 주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울까.

부모와 의사, 제약사가 힘을 모아도 불가능하다면 앞으로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북적이는 상점가엔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서럽게 울던 엄마는 어디로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우리가 뭘 어떡할 수 있을까’ 
태아 때 호빈이의 정밀 초음파 결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병원이 없었다. 그래서 찾게 된 서울아산병원이었다. 산부인과 원혜성 교수는 태아의 왼쪽 목 아래가 부어있고 림프부종으로 보인다고 했다. 심장이나 다른 부분은 괜찮은데 다만 한 가지.

“만약 혈관종을 동반한다면 조금 골치가 아프겠네요.” 얼핏 흘려들은 우려는 아이를 만날 때까지 엄마의 마음을 매일 헤집어 놓았다. ‘괜찮겠지? 괜찮을까?’ 출산일까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2022년 1월 몹시 시린 날, 호빈이를 만났다. 왼쪽 손과 다리가 많이 부어 있고 혈관종을 동반했다. 포도빛 주반이 곳곳에 보였다. 예상보다 심각한 상태였다. 부모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도 힘 내보자는 남편의 다독임도 아내의 귓가에 겉돌 뿐이었다. ‘뭘 어떡할 수 있는데?’ 호빈이는 핏줄 안에 혹이 생기는 희귀병으로 조금만 부딪혀도 혈관이 터지면서 온몸에 커다란 혹이 생겼다. 등에 혹이 생기면 제대로 누울 수도 없었다. 아파하는 아이를 안고 몇 날이고 밤을 지새웠다. 면역억제제는 증상을 잠시 잠재울 뿐. 그마저도 부작용이 하나둘 나타났다. 복용을 중단하기까지 부모에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치료법이 없는 암담한 현실에서 아이를 위한 최선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부모로서 미안하고 한편으론 서러웠다. 책임져야 할 존재가 나날이 커지면서 누군가의 가벼운 위로조차 마음에 더할 공간이 없었다. 세상과의 울타리를 높이 세우기 시작했다. 세 가족의 행복을 위한 최선이라 여겼다.   

 

간절함이 닿으면 
비슷한 질환을 앓는 환우 카페에서 표적치료제가 나왔다는 정보를 접했다. 아이에게 해줄 뭔가가 있다는 자체로도 새로운 희망이었다. 서둘러 이범희 교수의 진료를 예약했다. 신약에 대해 물어볼 것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했다. 가족 외에 아이의 질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교수는 부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골몰했다. “제가 못 챙긴 자료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의사는 뭐든 다 아는 사람, 그래서 대하기 어려운 존재로만 여겨졌던 부모에게 이 교수는 가장 많은 질문을 갖고 그 답을 찾으려는 의지가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다만 신약은 유전적 변이가 확인되고 2세 이상 되어야 신청이라도 해볼 수 있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유전자 검사에서 호빈이는 신약 복용 범위에 들었다. 하지만 연령이 문제였다. ‘2살까진 가정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건가?’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았다. 호빈이의 증상이 나날이 심각해지자 이 교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방법을 찾아 나섰다.

 

우리도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죠!” 


우선 제약사의 동의가 필요했다. 호빈이 엄마는 매일 제약사에 전화하고 해외 본사에도 메일을 보냈다. 곧 신약 출시를 앞둔 상황이라 임상 목적으로 제공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우리 아이가 너무 아픈데 여기 말곤 부탁드릴 데가 없어요”라며 연락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가만히 있느니, 뭐라도 하는 편이 나아!’ 부모이기에 끈질기게 매달릴 수 있었다. 간절함이 닿았는지, 제약사에선 내부 회의를 거쳐 무료 지원을 약속했다. 호빈이 아빠는 전 세계 2세 미만의 투약 사례를 직접 찾아 나섰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주치의들에게 신약 복용 효과를 알려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신기하게도 메일을 보낸 병원마다 모두 회신을 보내왔다. 이 교수는 2세 미만의 안정성을 근거할 자료를 덧붙인 신청서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냈다. 희귀병에 대한 경험이 적은 전문가들은 연거푸 반려 결정을 내렸다. 실망이 컸지만 계속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다. 더 이상 부모만의 간절한 바람이 아니었다.  

 

새로운 작전 
“혹시 이 방법은 어떨까요?” 이 교수는 새로운 돌파구를 제안했다. 뉴스 인터뷰였다. 아이의 투병 사실을 주위에 숨겨온 부부로선 큰 용기를 내야 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이 방법마저 소용없다면 신약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나라로 이민 갈 각오까지 세운 터였다. 뉴스 말미에 식약처 전문위원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다시 신청하면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재심의를 거친 후 신약 투여는 최종 허가됐다. 호빈이는 2세 미만의 국내 첫 복용 사례였다. 


신약을 복용한 이후 붓거나 혹이 생기는 일은 드물어졌다. 생긴다 해도 금방 가라앉았다. 특별한 부작용도 없었다. 뱃속 혈관이 회복되면서 뇌졸중, 심근경색의 위험에서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유달리 큰 왼발 때문에 샌들만 신어왔던 호빈이는 기성 신발을 골라 신었다. 걸음걸이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그동안 해결책을 찾느라 분주했던 부모는 호빈이를 더 예뻐하고 기뻐해 주지 못한 지난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주변과 쌓아 온 담도 자연스레 허물어졌다. 호빈이가 자신의 질병을 인식하고 사회에 당당히 서기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부모로서 구체적인 고민도 시작됐다. 

 

또 다른 세상이 알려준 것 
호빈이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난 2년의 경험은 포기하지 않으면 벗어날 길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제 한고비를 넘었을 뿐 많은 숙제가 남아있지만 전처럼 두렵지만은 않다고 호빈이 부모는 말한다. ‘환자’라는 이유로 움츠러들며 세상과 담을 쌓을 때, ‘호빈이’를 놓지 않으려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난 덕분이었다. 호빈이의 투약을 시작으로 2세 미만 혈관종 환자 15명이 신약 치료를 시작했다는 감격스러운 소식도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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